태풍이 지나가고, 그렇게 CFO가 된다
이권기 서울벤처스 상무(CFO) 인터뷰
태풍이 지나가고, 그렇게 CFO가 된다
2021.09.14 20:02 by 이창희

어렵게 이직을 결심하고 들어온 회사는 구성원들의 넘치는 열정과 기술력이 핵심인 곳이었다. 하지만 기업의 혈관이라 할 수 있는 재무가 너무나 엉망이었다. 스타트업답게 보유 자본력도 미미했다. ‘CEO의 반짝이는 비전과 눈빛에 넘어간 것인가’하는 후회가 밀려들었지만, 맥없이 발을 빼고 싶진 않았다. 자신을 믿고 불러준 선장, 그리고 경험과 역량만큼은 남부럽지 않은 선원들과 힘을 합쳐 이 잠재력 있는 난파선을 살려내고 싶었다. 그렇게 폭풍우 속에 2년의 시간이 흘렀고, 풍랑을 이겨낸 배는 정상적인 항로 위에서 신나게 가속 페달을 밟는 중이다. 그리고 어느새 그는 스타트업의 진정한 CFO로 거듭나 있었다. 이권기 서울벤처스 상무 이야기다.

 

이권기 서울벤처스 상무.(사진: 서울벤처스)
이권기 서울벤처스 상무.(사진: 서울벤처스)

|스타트업의 척박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다
2018년 설립된 서울벤처스는 이커머스 시장을 무대로 인공지능(AI) 기반 마케팅 솔루션을 개발·운영하는 스타트업이다. 군소 쇼핑몰들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는 ‘마케팅 솔루션’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 이들의 미션이었다. 이를 위해 CEO인 신현규 대표를 포함해 마케팅 분야 10년 이상의 경력자들이 C레벨에 포진했고, 이커머스 분야에서 오랜 개발 경력을 가진 전문가가 CTO로 합류했다. 나름 완벽에 가까운 라인업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퍼즐이 필요했다. 바로 최고재무책임자 즉 CFO였다. 전쟁으로 치면 경험치 높고 쟁쟁한 지휘관과 장수들이 모였지만 후방에서 병참을 담당할 중요한 역할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에 신현규 대표는 적임자를 백방으로 찾아 나섰고, 헤지펀드와 증권사에서 10년 이상 재무 컨설팅 경력을 가진 이권기 상무를 찾아 합류를 제안했다. 이 상무는 당시 신 대표와의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동안 큰 기업들을 대상으로 굵직한 컨설팅만 해오던 상황에서 스타트업의 대표를 처음 만났습니다. 신현규 대표는 그때까지 제가 만났던 리더 중 어쩌면 가장 ‘쪼렙’이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대번에 그릇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사람이란 걸 알아챘죠.”

이 상무는 2019년 여름 CFO 직급으로 서울벤처스에 전격 합류했다.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감도 잠시, 심각할 정도로 엉망인 재무 시스템과 텅 비다시피 한 ‘곳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무엇으로 돈을 벌고 그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를 평생 고민해온 그가 허탈함을 느끼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서울벤처스는 데스밸리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확신과 의지로 가득한 CEO, 그리고 풍부한 경험과 역량을 가진 멤버들을 두고 돌아서기에는 아쉬움이 컸다. 어떻게든 힘을 보태고 시너지를 창출해 성공으로 이끌어보고 싶다는 도전의식도 솟아났다.

“CFO로서 직원들의 급여 충당은 물론이고 각종 세금 납부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수익을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믿었고,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서비스가 공익적인 면이 있다는 점도 크게 작용했죠.”

 

서울벤처스는 마케팅 솔루션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사진: 서울벤처스)
서울벤처스는 마케팅 솔루션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사진: 서울벤처스)

|이 거친 상황과 불안한 회사와 그걸 지켜보는 CFO
이 상무는 가장 먼저 안정적인 재무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지만, 정작 CFO로서의 첫 임무는 의외의 곳에서 날아들었다. 그의 합류 직후 팁스(TIPS) 운영사 중 한 곳인 ‘N15’에서 서울벤처스에 팁스 지원을 제안해온 것이다.

“당시 서울벤처스는 홈페이지 구축도 미완성이었고 변변한 IR자료조차도 없던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N15은 하드웨어가 중심인 액셀러레이터인데 우리는 소프트웨어 기반 스타트업이었죠.그래서 ‘이거 혹시 사기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찾아가 만나보니 그들이 우리 회사 C레벨들의 SNS 활동을 오랫동안 지켜봐왔다 하더라고요.”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찾아온 기회를 살려내기 위해 이 상무는 바쁘게 움직였다. 팁스 지원을 위한 다양한 서류를 만들고, 엉망으로 방치돼 있던 자료들을 모아 장부를 정리했다. 팁스 수행을 위해 체납을 털어내고 수천만원에 달하는 분담금을 마련하고자 그는 신 대표의 ‘영끌’을 강요하다시피 했다. 상당한 모험이었다.

그렇게 3개월간의 우여곡절 끝에 12월 크리스마스 이브에 팁스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이듬해인 2020년 초부터 팁스 자금을 수혈 받으면서 ‘보릿고개’를 탈출할 수 있었고, 남아 있던 각종 채무도 깔끔하게 청산했다.

자금줄의 숨통이 트이면서 이 상무는 본격적으로 회사 내부의 재무 시스템을 손질하기 시작했다. 각종 툴을 다듬고 장부를 정리하는 것에서 출발해 어떤 자금 흐름에도 대응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해 1분기가 끝날 무렵 서울벤처스는 회계·세무 쪽으로 추가적인 품을 들이지 않더라도 회사 운영에 무리가 없는 단계까지 진입했다.

재무적 안정화가 이뤄지고 나자 그는 돌연 ‘외판원’으로 변신했다. 회사의 주력인 마케팅 솔루션을 직접 영업하기 위해서였다. 쇼핑몰 사업자들을 만나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갖고 자사 서비스의 강점을 어필했다. 단순히 솔루션을 제공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고객사의 효율성 향상을 위해 서비스 고도화와 커스터마이징에 주력한다는 부분을 강조했다.

“직접 팔아보니 알겠더라고요. 우리 서비스의 무엇이 부족하고 보완해야 하는 지점이 어디인지를요. 그래서 결국엔 개발 영역에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외부에 나가서 자신 있게 내놓고 팔 수 있는 수준까지 완성도를 올려 달라’고 반년 가까이 닦달했죠. 무언가가 팔리고 수익이 생겨야 CFO로서 개발 비용도 지원해줄 수 있고 외부 투자를 끌어올 기회도 생기지 않겠습니까.”

 

좁지만 치열한 서울벤처스의 회의 현장.(사진: 서울벤처스)
좁지만 치열한 서울벤처스의 회의 현장.(사진: 서울벤처스)

|스타트업 최고재무책임자의 본분이란
이는 어찌 보면 CFO의 영역을 벗어난 업무에 관여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상무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재무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에 맞춰 현금 흐름을 관리하며 주거래 은행을 트고 투자 기관을 만나는 게 CFO의 업무는 맞지만 전부는 아니다. 회사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본인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이든 뛰어들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물론 이 상무가 CFO의 기본적인 역할을 가볍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해 전날 입출금 내역과 당일 매입 혹은 지급이 이뤄질 부분을 체크하고, 월별·분기별 진행 상황을 기반으로 향후 대응 방안도 고민한다. 계획이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각종 변수를 토대로 예측을 내놓고, 예상치 못하게 발생한 구멍을 메우는 역할도 그의 몫이다.

“CFO가 회계·세무를 전공하거나 관련 자격증을 꼭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CFO의 F는 ‘파이낸셜(financial)’이지 ‘어카운트(account)’는 아니니까요. 그건 숫자를 볼 줄 알고 디테일을 가늠할 정도면 되고, 그보다 중요한 건 넓은 시야를 바탕으로 굵직한 전략과 계획을 수립하는 능력이죠.”

그는 최근 서울벤처스의 펀드레이징 작업에 한창이다. 시리즈A 투자 유치를 목표로 주 3곳 이상의 투자사들을 계속해서 만나고 있다. 프리젠테이션과 함께 자료를 건네고 검토를 요청한다.

무엇보다도 투자사마다 맞춤형 전략을 준비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투자사마다 IR에 대해 평가하는 포인트가 각양각색이기 때문이다. 기반 기술을 강조하는 투자사가 있고, 남들과 다른 차별점에 주목하는 투자사도 있다. 이 같은 부분에 초점을 맞춰 자료를 수정하고 업데이트를 반복한다.

이 상무의 향후 목표는 그리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거창하다. 본인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지금처럼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녁 약속은 주 1회를 넘기지 않고 늦어도 밤 10시까지 귀가하는 것을 원칙으로 정했다. 금요일 퇴근 이후부터 주말이 끝날 때까지는 업무를 보는 것도 최대한 지양한다. 부단한 소통과 네트워킹이 무기인 스타트업 CFO로서는 준수하기 쉽지 않아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제가 아프면 회사에도 악영향이 생깁니다. 저뿐만 아니라 C레벨이라면 건강관리는 절대적으로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고 봐요. 한 명 한 명의 역할과 역량은 크고, 그만큼 빈자리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대기업이 아닌 스타트업이니까요. 은퇴 후에 스톡옵션 정리해서 해외여행 다니며 여생을 보내는 게 꿈인데, 그것도 몸이 건강해야 가능하겠죠.(웃음)”

 

필자소개
이창희

부(不)편집장입니다. 편집을 맡지 않았으며 편집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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