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혁신, 그래서 혁신”…펜데믹 파고 넘는 실리콘밸리 스피릿
3人3色, 실리콘밸리의 K-스타트업 열전
“그래도 혁신, 그래서 혁신”…펜데믹 파고 넘는 실리콘밸리 스피릿
2021.04.26 22:09 by 최태욱

“한국에선 모두 코로나 시대 이전으로 돌아가길 희망하고 있죠. 하지만 여기 실리콘밸리는 그런 희망을 갖지 않아요. 이전 일상의 반도 회복하지 못할 거란 예측이 지배적이죠. 대신 완전히 바뀐 문화, 전혀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고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활동하는 어느 스타트업 대표의 전언이다. 실제 풍경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시사철 온화한 캘리포니아에도 ‘락다운’의 찬 서리가 내렸고, 꿈과 열정이 득실거리던 공유오피스들은 덩그러니 먼지만 쌓인다. “벌써 1년째 사람을 못 만났다”고 끌탕하는 목소리는 애잔하기까지 하다. 아예 실리콘밸리를 떠나는 움직임마저 포착될 정도다. 

실리콘밸리는 이 와중에 새로운 판을 짰다. ‘기존’이 무너지고 부서지는 동안, 전혀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진 것. 물리적인 제한은 역설적으로 제한 없는 환경을 만들었고, 실리콘밸리의 핵심이었던 다양성은 더욱 증대됐다. 자연스레 창업 활동은 더욱 왕성해졌다. 전 세계에 혁신의 DNA를 이식해왔던 스타트업 발상지다운 행보, 그야말로 “실리콘밸리가 실리콘밸리했다”는 얘기다. 

실리콘밸리에 불고 있는 변화의 바람, 그 풍속과 풍향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 바람에 맞춰 돛을 올린 스타트업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아마존‧페이스북‧구글‧넷플릭스‧에어비앤비 등 실리콘밸리 주요기업에서 활약하며 기업가정신을 키웠던 이들의 출사표는 실리콘밸리 변화의 증거이자, 스타트업씬의 포스트펜데믹 참고서다. 

 

펜데믹의 광풍 속 ‘실리콘밸리’에선 어떤 가치가 움트고 있을까?
펜데믹의 광풍 속 ‘실리콘밸리’에선 어떤 가치가 움트고 있을까?

| 고난의 시대, 기업은 더 높은 책임감을 요구받는다
코로나19 쇼크가 전 세계를 강타하던 시기에 때마침 부각된 개념이 있으니 바로 ‘ESG경영’이다. 현재 겪고 있는 대위기가 자연스레 ‘지속가능성’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면서, 환경(Environment),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 등 지속가능 경영을 위한 3대 핵심 요소에 대한 중요성이 급부상한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상반기에만 글로벌 ESG 투자 규모가 32% 증가하면서 “코로나 사태가 ESG시대를 앞당겼다”라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각각 아마존 소싱매니저, 페이스북 프로덕트매니저, 구글 프로덕트매니저로 활동하던 김누리‧최정서‧안정훈 공동대표가 비영리 스타트업 ‘밀포워드’를 설립한 것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과 맞닿아 있다. 

“미국은 진짜 심각했어요. 온통 셧다운, 락다운이었죠. 음식점도 간신히 배달만 하는 수준이었고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저소득‧소외계층은 사실상 배달에만 의지해야 하는데, 여긴 배달 비용이 음식 값의 두 배에 달할 정도로 비싸거든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역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여러 날 고민했고, 그 결과가 바로 밀포워드였습니다.”(안정훈 공동대표)

 

(왼쪽부터)김누리‧안정훈‧최정서 밀포워드 공동대표
(왼쪽부터)김누리‧안정훈‧최정서 밀포워드 공동대표(사진: 밀포워드)

지난해 4월 설립된 밀포워드는 자원봉사자 30여명과 함께 꾸려가고 있는 비영리 스타트업이다. ‘양질의 음식을 여러 공동체에 연결시키자’는 미션으로, 개인‧기업‧정부의 기부를 지역 식당들에게 연결하고, 이를 통해 지역사회의 저소득‧소외계층에게 건강한 음식을 제공하는 음식 기부 플랫폼을 운영한다. 설립 첫 해인 작년에는 코로나19로 고생하는 의료진, 거동이 불편한 시니어 그룹, 등굣길이 막혀 급식을 받지 못했던 학생들을 대상으로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했다. 최정서 대표는 “코로나19 때문에 경영 악화에 놓인 지역 식당들이 사라지면, 장기적으로 지역사회 전체가 피해를 본다”면서 “지역 소외계층과 함께, 지역 음식점들을 함께 챙기는 효과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기부 시장 규모가 연간 45조원에 이르는 미국에서 이런 서비스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실리콘밸리 핵심 기업에서 자동화 업무를 담당했던 공동대표들의 경험과 역량은 조금 더 유연하고 속도감 있으며 세련된 나눔 서비스를 가능케 했다. 대부분의 자선단체가 나눠주는 가공식품이 아닌, 갓 지은 고품질의 도시락을 제공할 수 있는 이유도 이들이 구축한 자동화 시스템 덕분이다. 김누리 대표는 “우리와 제휴한 레스토랑 중에 미슐랭 출신의 쉐프가 운영하는 곳도 있는데, 우리 취지에 공감해 합리적인 가격에 고품질의 음식을 제공해준다”면서 “대단히 새롭거나, 엄청나게 높은 가치를 구현하겠다는 마음보다는, 누구나 좋은 음식을 먹을 권리는 있다는 생각으로 서비스를 만들어가고 있다”고 덧붙였다.

 

밀포워드의 서비스를 받은 의료진의 모습. 의료진이 직접 쓴 감사노트(가운데 하단)가 눈에 띈다.(사진: 밀포워드)
밀포워드의 서비스를 받은 의료진의 모습. 의료진이 직접 쓴 감사노트(가운데 하단)가 눈에 띈다.(사진: 밀포워드)

밀포워드의 창립자들은 “지금의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회사를 바라보는 눈도 이전 세대와 다르다”고 입을 모은다. 내가 원하는 회사보다 나를 원하는 회사에, 돈을 잘 만드는 회사보다 돈 이상의 가치를 잘 만드는 회사에 더 끌린다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또래 친구 3명이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지역 내 시니어센터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었는데, 거기서 끼니를 해결하던 어르신 한 분이 황망함에 극단적인 선택까지 생각했었다고 하더라고요. 다행히 우리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시니어센터는 존속될 수 있었고, 그 어르신의 비극도 막을 수 있었죠. 작은 혁신으로 큰 변화를 만드는 것. 우리가 하고 싶었던 일이고, 계속 해나가야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최정서 공동대표)

 

| 초연결의 시대에 ‘열정 이코노미’를 다루는 법 
코로나19 이전의 세상에서 ‘언택트’, ‘비대면’ 같은 용어는 그야말로 생소한 것이었다. 교류와 네트워킹이 생명인 스타트업 분야에선 부정적인 뉘앙스마저 풍겼다. 하지만 이젠 대세를 넘어 필수불가결한 흐름이다. 산업계 전반에 원격‧재택의 시스템이 구축되는 등 스마트워크 시스템이 보편화되고 있다. 미국 회사 5곳 중 3곳이 재택근무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있을 정도다. 

비단 업무 영역의 얘기만은 아니다. 원격을 강제하는 시대의 요구는 ICT혁신을 더욱 부추겼고, 세상 만물이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초연결 사회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ICT분야의 한 관계자는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고 당황스런 면도 있었지만, 경험이 쌓일수록 원격이 가진 효율성과 생산성이 주목받고 있다”면서 “스타트업 분야 역시 원격을 통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려는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고 귀띔했다. 

‘뮤즈타운’ 역시 이런 고민의 끝에서 탄생한 비즈니스다. 최근 핫해진 ‘열정 이코노미’(개인이 가지고 있는 열정을 생계 수단으로 발전시키는 것) 분야를 대상으로 크리에이터‧인플루언서와 기업 브랜드를 잇는 IT플랫폼이 비즈니스의 골자다. 

“과거에는 대기업들이 큰 비용을 들여 인플루언서를 활용했어요. 하지만 이젠 중소규모 브랜드들도 인플루언서를 동원해 마케팅을 해야 하죠. 고객들이 전부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 같은 데 있으니까요. 결국 인플루언서는 필연적으로 브랜드와 만나게 됩니다. ‘수많은 브랜드와 크리에이터들을 보다 효율적으로 연결시킬 수는 없을까?’라는 고민이 바로 뮤즈타운의 시작점이었죠.”(이성호 뮤즈타운 대표)

 

이성호(오른쪽) 뮤즈타운 대표(사진: 뮤즈타운)
이성호(오른쪽) 뮤즈타운 대표(사진: 뮤즈타운)

뮤즈타운은 각각의 SNS채널과 그 속의 다양한 콘텐츠 연구를 통해, 기업들에게 최적의 효과를 줄 수 있는 채널, 크리에이터, 콘텐츠의 데이터를 쌓아가고 있다. 고객들이 선호하는 콘텐츠와 소비 방식도 집계한다. 이는 기업에겐 브랜딩을, 인플루언서에겐 수익과 포트폴리오를, 고객에겐 즐거움을 주기 위한 실천 과제다. 현재는 지난해 개발한 인플루언서 검색엔진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뮤즈타운 2.0’을 내부에서 테스트 중이다. 뮤즈타운 2.0은 세상의 모든 인플루언서와 브랜드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글로벌 플랫폼으로, 올해 2분기 안에 베타 론칭될 계획이다. 

글로벌 OTT 플랫폼 넷플릭스에서 일하던 이성호 대표는 다양한 업무 경험을 통해 플랫폼의 저력을 확인했다. 지난 2018년 6월 뮤즈타운을 설립하고 지난해 지금의 플랫폼을 완성하기까지의 긴 부침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이유 역시 플랫폼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넷플릭스에서 일할 때 크게 성공한 콘텐츠 중 하나가 ‘기묘한 이야기’였어요. 이전 커리어가 변변찮은 형제 감독 작품에, 초기 시나리오 반응도 냉랭했죠.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초대박이 난거에요. 넷플릭스라는 플랫폼 없이 그 작품이 있었을까요? 우리 플랫폼 역시 세상에 새롭고 유익한 가치를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이성호 대표) 

 

|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힘, 개성과 다양성
실리콘밸리의 경쟁력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 가치 중 하나가 바로 ‘다양성’이다. 다양한 출신, 성별, 배경, 문화가 자연스레 어우러져 미션과 비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내달린다. 이는 프로젝트 단위의 팀부터 거대 글로벌 기업까지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작동원리다. 실리콘밸리에서 전 세계의 다양한 요구를 만족시키는 상품과 서비스가 우후죽순 쏟아져 나올 수 있었던 비결이다. 

작금의 펜데믹은 이런 다양성을 더욱 확대시키는 계기가 됐다. 시공의 제한이 시공을 초월하는 단초를 제공하며, 샌프란시스코부터 산호세까지의 지리적 경계는 그저 지도에만 존재하는 구분선에 불과해졌다. 실리콘밸리의 한 스타트업 대표는 “(코로나19로)이곳에 있던 지인 절반이 실리콘밸리를 떠났지만 여기 있는 것과 똑같이 일하고 있다”면서 “실리콘밸리에 있지 않아도 실리콘밸리의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오히려 실리콘밸리를 더 강력하게 만든다”고 했다. 

실리콘밸리에서 한국 정치를 소재로 비즈니스를 하는 스타트업 ‘옥소폴리틱스’가 주목한 것 역시 다양성의 힘이다. ‘모든 사람들의 모든 생각’이라는 미션으로, 지난해 4월 (한국)총선에 맞춰 론칭한 이 회사는 다양성의 힘을 기치로 솔직하고 편하게 정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플랫폼을 운영한다. 유호현 옥소폴리틱스 대표는 “에어비앤비의 개발자로 일하면서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다양성의 저력을 실감했다”면서 “편가르고 싸우는 정치 담론이 아닌, 안전하고 재미있게 토론할 수 있는 정치 플랫폼을 만들고 싶어서 창업에 도전했다”고 말했다. 

 

유호현(사진) 옥소폴리틱스 대표(사진: 옥소폴리틱스)
유호현(사진) 옥소폴리틱스 대표(사진: 옥소폴리틱스)

옥소폴리틱스는 니 편 내 편, 선과 악 같은 이분법을 지향하기 위해 방대한 데이터를 활용한다. O-X 방식의 다양한 질문으로 도출되는 경우의 수를 시각화한 후 클러스터링 기법을 통해 답변자의 정치적 성향을 이끌어내는 식이다. 유호현 대표는 “O-X 질문 10개면 1024가지의 경우의 수가 생긴다”며 “이를 바탕으로 호랑이, 하마, 코끼리, 공룡, 사자 등 동물 부족 등이 형성되는데, 이는 좌우나 진보‧보수보다 훨씬 정확하고 세분화된 토론을 가능케한다”고 설명했다. 

유 대표는 현재 한국 정치는 굉장히 중요한 시기에 놓였다고 진단한다. 내가 국가를 위하는 단계에서 국가가 나를 위하는 시기로 변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지금껏 성장모델로만 발전해왔어요. 정치, 경제 모두 그렇죠. 이젠 다릅니다. 국가가 개인들의 발전을 위한 플랫폼이 돼야 하는 시대죠. 그게 선진국의 방식이고요. 힘을 모아 끌고 가는 게 아니라 각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진화하는 것, 그것이 우리 플랫폼의 근간이라고 생각합니다.”(유호현 대표)

현재 옥소폴리틱스의 월 평균 순 방문자 수는 7만 명이 넘는다. 플랫폼으로서 기능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수치다. 한국 정치 무대를 대상으로 비즈니스를 검증한 이후 미국 정치판에도 진출할 계획이다. 이 회사의 마지막 목표는 정치에 블록체인 기술을 결합해 ‘액체 민주주의(Liquid Democracy)’를 구현하는 것이다. 유 대표는 “4~5년에 한 번씩 하는 선거 대신 실시간으로 내 표를 줬다 뺐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라”면서 “혹시 정답이 될 수 없다고 해도 다양한 실험과 피드백을 통해 정치 발전의 계기 정도는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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