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女地)없던 창업 전선…‘잔다르크’들이 출격한다
집중탐구, 여성 창업가의 오늘과 내일
여지(女地)없던 창업 전선…‘잔다르크’들이 출격한다
2021.03.08 11:23 by 최태욱

여성의 일‧가정 양립은 만고불변의 난제다. 세상이 바뀌어 ‘유리천장’ 같은 용어가 고루하게 느껴지는 시대라지만, 현실은 여전히 팍팍하다. 코로나19의 후폭풍만 봐도 바로 티가 난다. 지난해 똑같이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여성 취업자 수는 남성 취업자에 비해 전년 대비 1.6배나 더 감소했다. 그 범위를 30대 여성으로 한정하면 감소폭은 훨씬 더 커진다. 

여성 창업은 매우 합리적인 대안이다. 높은 학력과 풍부한 경험이 재활용되는 발판이며, 지속적인 고용, 일‧가정 양립에 있어서도 유연함이 발휘된다. 여성을 차별 혹은 배제하는 조직의 논리가 기존의 것이었다고 가정하면, 혁신을 기치로 하는 스타트업은 기성과 기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탈출구다. 실제로 준비된 창업가들이 이러한 엑소더스 대열에 속속 합류하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가 지난 달 발표한 ‘2020년 창업기업 동향’을 보면, 여성 창업기업의 비율이 46.7%나 된다. 두 곳 중 한 곳은 여성이 사장님이란 얘기다. 여성 창업기업의 여성 고용률이 70%를 상회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여성 고용 문제까지 해결되는 묘수다. 

바야흐로 여성 창업가의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더퍼스트미디어>에서는 여성의 자유와 인권의 신장을 위해 마련된 ‘세계 여성의 날’(3월 8일) 113주년을 맞아 현재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여성 창업가들의 목소리를 토대로, 국내 여성 창업기업의 오늘과 내일을 진단해봤다. 

 

지난해 창업한 기업의 46.7%가 여성이 소유‧경영하는 ‘여성기업’이다.
지난해 창업한 기업의 46.7%가 여성이 소유‧경영하는 ‘여성기업’이다.

| ‘여심이 민심’…소비‧경험‧공감 무기로 한 여성 친화적 창업 러시
최근 유통가의 화두는 이른 바 ‘보복소비’다. 거리두기로 억눌렸던 소비 심리가 살랑살랑 봄바람에 맞춰 펄럭인다. 특히 해외명품, 여성패션, 화장품, 가전 등의 상품이 불티나게 팔려 나간다. 소비 시장에서 여성의 존재감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비 행태를 주도하는 여성의 특징은 창업의 관점에서도 주효하다. 무엇을 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무엇을 팔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과 맞닿아 있다. 여성들의 주요 소비처인 뷰티, 패션, 미용, 육아, 교육, 여행 등이 특히 그렇다. 소비 과정에서 때론 감각적으로, 때론 섬세하게 포착해낸 문제의식이 비즈니스의 밑 재료가 되는 셈이다. 

풍부한 재료가 국내의 여성창업 육성책과 맞물리자 잠재력이 폭발했다. 이미 2010년대 중반부터 정부, 지자체, 민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여성 창업지원 프로그램과 수출‧판로‧인력을 지원하는 세부사업까지 다양한 인프라가 조성됐고, 결혼‧임신‧출산‧육아 등으로 인한 경력 단절을 극복하고 싶은 여재(女才)들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지난해 여성 창업기업 수는 총 69만3927개. 전년 대비 16.5%나 늘어났는데 이는 남성의 14.7%를 상회하는 수치다. 벌써 10년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이나 고용률이 주요 선진국에 비해 부진했던 것을 감안하면 꽤나 흥미로운 현상이다.

 

(출처: K-스타트업 / 디자인: 김주영 기자)
(출처: K-스타트업 / 디자인: 김주영 기자)

여성 친화적인 창업으로 첫 손에 꼽히는 건 역시 패션‧뷰티 분야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꼈던 아쉬움에 여성 특유의 감성적이며 섬세한 터치가 더해지는 순간 작은 혁신이 고개를 든다. 2019년 설립된 ‘루나써클’도 그 중 하나다. 일상에서 꼭 필요한 워시, 삼푸, 세제 같은 제품을 유해성분과 환경오염 없이 만들어내는 소위 ‘클린뷰티’ 제조 플랫폼 업체다. 이재연 루나써클 대표는 “우리 철학은 내 건강을 위한 것이 곧 자연의 건강을 지킨다는 것”이라며 “여성의 일상적인 경험과 그를 통해 도출된 문제를 사회적 문제와 연결해 풀어낸 점이 포인트”라고 설명했다. 루나써클의 대표 브랜드 ‘그린아뜰리에’는 건강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는 분위기 속에서, 최근 오픈한 ‘더현대서울’에 입점하는 등 큰 호응을 얻고 있다. 

교육 분야 역시 여성 창업가들의 주 무대다. 비대면 온라인 교육 플랫폼을 운영하는 ‘커넥트위드’의 김미희 대표는 지난해 창업진흥원의 ‘예비창업패키지’(여성벤처 특화)를 통해 사업을 일군 케이스. 교육과 놀이 기능을 합친 유아 대상 클래스를 라이브로 진행한다는 차별성에 유아교육학 석사 출신이라는 전문성이 합쳐져 경쟁력을 더한다. 이 회사의 서비스는 현재 론칭을 목전에 두고 있다. 김 대표는 “일단 소비자에게 직접 서비스하는 방식을 테스트한 후, 향후 교육 자료를 납품하는 B2B 형태의 비즈니스로 확장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클린뷰티 제품을 제조하는 루나써클(왼쪽)과 비대면 교육 플랫폼을 운영하는 커넥트위드(사진: 각 사)
클린뷰티 제품을 제조하는 루나써클(왼쪽)과 비대면 교육 플랫폼을 운영하는 커넥트위드(사진: 각 사)

젠더 감수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비즈니스 아이템은 여성 창업기업만의 독특한 매력이 엿보인다. 여성용 트렁크와 드로어즈(drawers‧몸에 달라붙는 짧은 반바지 형태의 남성용 팬티)를 제작‧판매하는 ‘FWWL’는 옷을 통해 사회 문화에 담긴 성차별 인식을 바꿔보자는 포부로 출발했다. 

“의복은 생각보다 많은 사회적 차별을 내포하고 있어요. 기존의 바지 시접이나 반팔 티셔츠도 남성의 신체를 기준으로 재단되어 여성에게 불편함을 주고 몸에도 좋지 않죠. 이를 하나씩 바꿔가면서 젠더 감수성을 제고하는 것이 목표에요. 여성이 입는 트렁크 속옷이 그 시작이죠. 남성은 가정 내에서 팬티 하나만 입고 다니지만, 여성은 그렇지 못하잖아요.(웃음)”(김소연 FWWL 대표)

제품 본연의 가치도 그 안에 담긴 메시지 못지않다. 생리적인 문제까지 고려한 기능적 설계에 디자인의 완성도까지 돋보인다. 이미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서 충성 고객을 확보한 FWWL는 향후 더 큰 무대를 준비 중이다. 

4년차 스타트업 ‘세이브앤코’는 여성의 성 문화를 금기시하는 인식을 바꿔야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회사명(SAIB)까지 ‘편견(BIAS)’이란 단어를 뒤집어 만들었을 정도로 적극적인 자세다.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는 “성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것이지만 여전히 음성적이며 남성 주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면서 “특히 잘못된 인식 탓에 여성의 건강에 문제를 야기하는 요소가 많다”고 지적했다. 현재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은 프리미엄 콘돔과 여성 청결제. 박 대표는 “앞으로도 여성의 성과 건강을 챙겨주는 제품을 지속적으로 소개하며, 올바른 성 인식이 자연스럽게 확산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FWWL의 여성용 트렁크 제품. 사명은 ‘from woman with love’의 약자다.(사진: FWWL)
FWWL의 여성용 트렁크 제품. 사명은 ‘from woman with love’의 약자다.(사진: FWWL)

| 양에 가려진 질적 한계…투자‧교류‧확장의 난제는 여전
특유의 여성성(Femininity)을 무기 삼아 양적 성장을 일궈 나가고 있는 여성 창업 분야. 20~30대 창업 비율, 기술기반 창업 비율, 여성기업 투자유치 금액 등도 조금씩 증가하는 등 좋은 신호도 감지된다. 하지만 현장에서 갈무리한 여성 기업가들의 목소리가 마냥 희망적인 건 아니다. 행간 사이 아쉬움이 숨어있고, 대화 곳곳에선 불안감도 드러난다. 이는 오롯이 여성 창업의 걸림돌이 되어 질적 성장을 저해하는 요인이 된다. 새 시대의 첨병 역할을 해야 하는 스타트업 분야에 고루하다고 치부했던 ‘유리천장’이 존재하는 아이러니다. 

“나이 지긋하신 남성 투자자께서 대뜸 ‘이게 되겠어?’라고 말을 놓으시더라고요. 공식적인 투자 미팅 자리였는데… 순간 힘이 쭉 빠지면서 설득하고자 했던 의욕 자체가 사라졌어요.”

모 여성 창업가의 회상에는 현재 그들이 짊어져야 할 편견의 무게감이 잘 드러난다. 스타트업은 내부 경영만큼이나 외부 활동이 중요한 조직이다. 투자유치, 네트워킹, 정부사업 참여, 협업 등 기업의 스케일업(scale up)을 위한 활동이 모두 외부에서 이뤄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생기는 편견과 그로 인한 소외는 치명타가 될 수밖에 없다. 패션 분야의 한 여성 창업자는 “투자 받는 과정에선 ‘나이 어린 여자가 무모하게 덤빈다’는 식으로 바라보더니, 정작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니까 허무맹랑한 제안을 하는 사기성 접근이 넘쳐나더라”면서 “사업에만 집중하기에도 벅찬데… 여자라는 이유로 쓸데없이 에너지를 뺏기는 것 같아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다”고 했다. 

실제 여성기업의 투자유치 금액은 전체의 5분의 1수준. 하지만 현장에서 느끼는 체감 난이도는 훨씬 더 크다. 투자의 키를 쥔 VC나 심사역 등이 지나치게 남성 주도적인 업무인 것도 아쉬운 부분. 아예 특정 산업 분야에선 “여성이 대표인 스타트업 투자는 꺼린다”는 소문이 흉흉하게 돌고 있을 정도다. 

 

고정관념으로 인한 외부활동의 제약은 스타트업에게 치명타로 작용한다.
고정관념으로 인한 외부활동의 제약은 스타트업에게 치명타로 작용한다.

여성을 위한 창업 커뮤니티 ‘스타트업 팜므’를 운영하는 이혜진 대표는 “여성 창업경진대회 같은 여성 특화 정책이 특혜를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여성들만 모아서 해야 뭔가가 되겠다’는 궁여지책으로 볼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스타트업 분야가 이미 남성 주도적으로 짜인 판이란 반증인 셈이라는 것. 이 대표는 이어 “여성 창업가들은 여성이기 때문에 배려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기 때문에 평가절하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경희 한국창업전략연구소장 역시 “우리나라 전체의 기업 문화가 남성 중심적이라 여성들이 대외 활동 및 커뮤니케이션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이는 내부 조직 관리에도 영향을 미쳐 리더십의 한계를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교류‧투자의 부재는 곧 동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많은 여성 기업들이 성장보다는 생존을 걱정하는 이유다. 여성 기업에서 생계형 창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89.2%, 반면 국내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스타트업)의 여성 창업자 비율은 5.7%에 그친다. 

 

| ‘여성 스타트업’ 말고 ‘스타트업’ 되기 위한 자구 노력도 필요
성 차별 이슈는 오랜 시간 단단히 굳어진 악습이다. 스타트업의 천국이라는 미국조차 남녀 투자규모의 차이가 30배에 달할 만큼, 동서양을 막론한 병폐다. 창업 전선에 투신한 여성 기업가들 역시 이 부분을 모를 리 없다.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는 “사회적 인식과 맞선다는 각오를 가지고 시작했다”면서 “생각보단 버겁지만, 그래도 많이 바뀌고 있고 우리가 그 과정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있다”고 했다. 

결국 단기 해결책은 ‘탁월한 아이템’ 뿐이다. 한 엑셀러레이터 관계자는 “여성 기업에의 투자가 미비한 것은 사실이지만, 좋은 아이템으로 승부하는 여성 기업 자체가 극소수인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이제는 조금 더 확장된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패션이나 미용 같이 여성성에 국한된 사업 아이템은 자체적으로 과당 경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레드오션’이라는 것. 김소연 FWWL 대표는 “여성벤처협회의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니, 업태가 대부분 비슷비슷하다는 게 한 눈에 드러나더라”면서 “특히 기술 분야에 여성이 적은데, 추후 학습을 통해 패션 분야에 기술을 접목한 도전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변화의 물결이 조금씩 일렁인다. 인공지능, 블록체인, ICT, 바이오 등의 기술기반 창업에 도전하는 여성들이 점점 늘고 있고, 벤처기업 등의 기술 인증을 획득하는 사례도 꾸준한 증가세다. 보수적이라고 소문난 금융 시장에도 ‘에임’의 이지혜 대표, ‘핀다’의 이혜민 대표 같은 롤 모델이 속속 등장하며 활력을 더한다. 이경희 소장은 “남성이 대외 활동에 강점을 보인다면, 여성은 일에만 집중하고 일로 승부를 거는 특성이 있다”면서 “투명하고 꼼꼼한 일처리가 부각되고 검증된다면, 새로운 여성 친화적 시장을 열어젖힐 가능성도 있다”고 조언했다. 

 

2019년 기준, 정보화혁신전문기업으로 분류되는 여성 기업은 전체의 5%내외에 불과하다.
2019년 기준, 정보화혁신전문기업으로 분류되는 여성 기업은 전체의 5%내외에 불과하다.

여성 스스로 젠더에 갇히지 않으려는 마음가짐도 중요하다. 이재연 루나써클 대표는 “정말 원하는 걸 구현해보고 싶어 스타트업에 도전했다면, 성별에 상관없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창업 생태계 안에서 여성이란 이유로 종종 주저하는 것을 보곤 하는데,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면 내가 바뀌면 된다는 마음으로 극복해 나가면 될 것”이라고 했다. 박지원 세이브앤코 대표는 “많은 여성 창업가들이 자신이 외향적이지 못해 스타트업에 맞지 않는다고 걱정하는데, 미디어에서 비춰지는 창업가의 남성적이며 활동적인 모습만이 모법답안은 아닐 것”이라면서 “내향적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높은 집중력과 신중함, 그리고 따뜻한 공감능력이 또 다른 성공 신화의 비결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고 말했다. 

 

필자소개
최태욱

눈이 보면, 마음이 동하고, 몸이 움직이는 액션 저널리즘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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