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만들고, 브랜드 더하니… 사과, 예술이 되다
사과농부가 된 피아니스트_김아진씨
캐릭터 만들고, 브랜드 더하니… 사과, 예술이 되다
2018.08.10 18:04 by 송희원

 

“평생 피아노만 치던 손으로… 뭘 하겠다고?”

지난해 초 딸의 청천벽력 같은 선언에 아버지는 귀를 의심했다. 딸은 피아니스트였다. 그냥저냥 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시립합창단 반주자로 국내외에서 활동하며, 대학 강단에 설 정도로 전도유망했다. 그런 그녀가 아버지를 따라 사과나무를 키우겠단다. 평소 관심을 보이거나, 과수원 일을 좋아했던 것도 아니다. 시쳇말로 ‘나무 근처에 얼씬도 안 했을 정도’였으니 아버지의 황당함을 짐작할 만하다. 50년간 사과나무를 키웠던 아버지와 40년간 피아노만 쳤던 딸의 팽팽한 줄다리기는 결국 딸의 승리로 끝났다. ‘사과농부가 된 피아니스트’ 김아진(47·경북 경주시)씨 얘기다.

피아니스트로 활동했던 김아진씨의 모습.(사진: 김아진씨)

 

| 피아니스트의 변주곡, 곡명은 ‘과수원을 지켜라’

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에는 상수원 보호구역인 경주 덕동댐을 낀 1만6529m²(약 5000평) 규모의 과수원이 있다. 이곳에선 깨끗한 물을 먹고 자란 사과가 매년 2500상자씩 생산된다. 시기별로는 아오리(8월), 히로사키(9월), 시나노 스위트(10월), 부사(11월) 등 총 4가지 품종의 사과를 일 년 내내 수확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암곡동 풍전사과농장.(사진: 김아진씨)

김아진씨 가족은 이곳에서 2대에 이어 사과농사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여느 농가가 그렇듯 현실적인 어려움에 봉착했다. 주로 농협에 직판하거나, 지인 중심의 직거래를 진행하던 방식이 한계를 드러낸 것. 김씨는 “판로 확보에 늘 어려움이 많으셨다”면서 “아버지가 힘들게 일하는 것에 비해 얻는 게 턱없이 부족하단 걸 깨닫고, 늘 맘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피아니스트에서 농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직접적이며 결정적인 이유다.

물론,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김씨는 자부심과 주위의 인정을 동시에 받고 있던 음악가였다.

고민의 나날이 이어졌다. 하지만 아버지가 50년간 일군 과수원이 품은 가치가 자신의 커리어보다 크다고 생각했다. 앞뒤 안 가리는 ‘효심’만으로 덤빈 것도 아니다. 천천히 일을 도우며 판로에 대해 고민했고, 사과를 활용한 다양한 가공품을 떠올렸다. 마치 리듬과 선율에 다양한 변화를 꾀하는 ‘변주’처럼 말이다.

 

| ‘브랜드 입힌 사과’가 ‘꿀 먹은 사과’보다 낫다

2017년 8월, 김씨네 과수원은 오롯이 3대째가 됐다. 김아진씨는 대권을 물려받자마자 새로운 판로개척에 나섰다. 그리곤 다양한 사과 가공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사과잼, 사과칩, 사과청, 사과식초, 사과초고추장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전문 디자이너와 함께 캐릭터 ‘나봄이’를 만들어 ‘피아노치는 사과농부’라는 사연을 제품에 담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걱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냥 사과도 잘 안 사 먹는 요즘에 이렇게 만들어 놓은 걸 누가 사 먹겠노”라며 끌탕 했다. 그 걱정은 길게 가지 않았다. 김아진씨가 직접 만든 사과 가공식품이 인근 플리마켓에서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이다.

“사실 농산물에 디자인을 입혀 브랜딩하고 소량포장 하는 건 오랫동안 농사만 해온 아버지껜 낯선 방식이었어요. 하지만 주문량이 많아지는 걸 보시곤 이젠 먼저 나서서 조언해줄 정도로 관심이 많아지셨죠.”(김아진씨)

제품사진. 캐릭터 이름인 ‘나봄이’는 프랑스어로 사과가 “La pomme(라봄)”과 비슷해서 지은 이름. ‘봄을 앞두고 태어난 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녔다.(사진: 김아진씨)

판로 개척이 지상과제였던 김씨에겐 모든 채널이 ‘기회의 땅’이다. SNS를 통한 홍보는 물론, ‘네이버 스토어팜’과 ‘아이디어스’ 같은 온라인 쇼핑몰에도 입점했다. 플리마켓이나 농업박람회에도 꾸준히 나가 고객들을 직접 만나 소통한다. 지난 5월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얼굴있는 농부시장’에 참가해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에게 직접 만든 ‘나봄이’ 텀블러와 에코백을 나눠주기도 했다.

“농업에도 디자인과 새로운 마케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농업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보고 싶었죠. 박람회나 플리마켓에서 많은 분들이 ‘어떻게 이렇게 사과에다가 예쁘게 옷을 입힐 수 있냐?’, ‘재배하느라 바쁠 텐데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냈냐?’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셨어요. 투자자들이나 바이어분들에게 납품 문의도 많이 받고 있고요.(웃음)”

(좌)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얼굴있는 농부시장’ 김아진 씨의 모습. / (우)킨텍스에서 열린 ‘케이팜 귀농귀촌박람회’에서 모녀의 모습.(사진: 김아진씨)

| 내친김에 4대까지, 달콤한 꿈은 계속된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농부가 된 딸. 그런데 그녀의 딸 역시 어머니의 전철을 밟으려 한다. 김씨의 딸 이슬기(23·충남대학교 원예학과)씨는 현재 주말마다 사과농장에 와서 일손을 돕고 있다. 김아진씨가 가업을 물려받을 때쯤 딸은 대학에서 2년째 불문학을 전공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녀의 전공은 ‘원예학’으로 바뀌어있다. 김씨는 “아이한테 농사가 자칫 힘들고 고루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해 ‘농사 말고도 아이템이 무궁무진하니 같이 한번 해보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회상했다.

결국 딸 역시 어머니와 함께 과수원을 운영하기로 결정하고, 원예학과로 전공을 바꿨다. 지금은 대학에서 체계적인 농사법과 농업 디자인, 마케팅 등을 배우며 사과농장의 브랜드를 보다 전문적으로 다듬을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아진씨는 이런 딸이 여간 든든한 게 아니다. 김씨는 “평일에는 대학에서 공부하고 주말에는 일을 도와주러 온다”면서 “딸은 이제 내 최고의 지원자이자 파트너가 됐다”고 엄지를 추켜세웠다.

농부 김아진씨의 하루는 고되다. 새벽 5시에 농장에 나가 작업을 시작하고, 오후에는 제자와 같이 운영하는 피아노학원에서 레슨까지 해야 한다. 저녁에는 주문 들어 온 가공품을 일일이 수작업으로 만든다. 그야말로 하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산다. 일 년을 봐도 그렇다. 사과농사는 꽃이 피는 봄부터 시작해 적과(열매 솎아내기)를 하는 4월, 수확 철인 여름, 대목인 추석까지 숨 쉴 틈 없이 돌아간다. 하지만 바쁜 와중에도 김씨는 향후 계획을 구상하느라 밤잠을 설친다.

“음악과 함께하는 체험교육농장을 구상 중이에요. 따분하게 과수원만 둘러보는 게 아니라, 함께 노래도 만들어 부르고,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서 사과잼도 만들어 보고요. 아이들이 저희 농장에 와서 사과에 대해 알아가며, 함께 달콤한 행복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어요.”

나봄이의 귀농팁 

“먼저 철저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농사는 절대로 만만하게 봐선 안 됩니다. 아버지께서 늘 강조하시는 것이 성실함입니다. 제가 농사를 지어보니 관심과 사랑이 많이 들어간 나무는 확실히 다른 나무들과는 다르더라고요. 무엇보다 나만의 특징을 잘 표현할 수 있는 브랜드가 필요합니다. 타인의 성공사례와 동일하게 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저도 지금 끊임없이 고민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고요.”(김아진씨)

 

필자소개
송희원

목표 없는 길을, 길 없는 목표에 대한 확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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