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서울꼬뮌, ‘빨간맛’을 탐하다
불온함을 덧씌우는 껍데기는 가라, 진도 홍주
21세기 서울꼬뮌, ‘빨간맛’을 탐하다
2018.05.11 19:28 by 이창희

우리의 근대사는 레드 콤플렉스로 점철돼 왔다. 해방 이후 권력을 쥔 독재정권은 붉게 윤색된 이념을 왜곡·과장시켜 공포심을 자극했고, 인권을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했다. 하지만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한반도 남북의 두 지도자가 손을 맞잡고 종전을 선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낡은 이념 따위는 더 이상 우리를 얽어맬 수 없게 된 오늘날, 붉은 것이라면 뭐든 터부시해야만 했던 그 야만의 시절을 겪어내고 극복해낸 것을 기념해도 될 때가 왔다. ‘새빨간진도 홍주와 함께.

고급진 느낌을 팍팍 풍기는 오늘의 주인공, 진도 홍주. (사진: 고난의 행군)
고급진 느낌을 팍팍 풍기는 오늘의 주인공, 진도 홍주. (사진: 고난의 행군)

진한 붉은 빛을 자랑하는 홍주는 지난주 안동소주에 이어 또 다시 증류식 소주다. 전남 진도의 특산품으로, 쌀을 사용해 발효와 증류를 거쳐 만든다. 진도에서 자생하는 지초(芝草)로 걸러내는 과정을 통해 특유의 붉은색이 입혀진다. 40도의 높은 도수를 가졌음에도 다른 증류주들에 비해 향긋하고 달달한 뒷맛이 있어 부드럽다.

조선 성종 임금 시절 경상절도사 허종이 아침부터 홍주를 마시고 출근하다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입궁하지 못했고, 이 덕분에 갑자사화를 모면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설화가 있다. 후에 허종의 후손이 진도로 낙향해 홍주를 빚어온 것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전주의 이강고(이강주), 정읍의 죽력고와 함께 육당 최남선이 꼽은 3대 명주에 포함됐다. 악명 높은 친일파의 선택이긴 하지만 술에 대한 취향까지 탓하진 말자.

1994년에 이르러 전남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됐으며, 2000년대 들어 진도군의 신활력사업으로 탄력을 받아 현재는 대형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게 됐다.

WHEN: 만춘(晩春)5월 어느 날

WHERE: 퇴근길 책한잔

DISHES: 편의점 삼합

MEMBERS: 고난의 행군(36·진보 꼰대), 자력갱생(35·책방 주인), 리밥에 고깃국(35·정보 없음), 편집장(본 에디터)

자세히 보면 술잔을 든 손까지 붉다. 뒤에 보이는 책들은 불온서적일지도 모른다. (사진: 고난의 행군)
자세히 보면 술잔을 든 손까지 붉다. 뒤에 보이는 책들은 불온서적일지도 모른다. (사진: 고난의 행군)

붉은 이념과 사상으로 중무장한, 홍주의 빛깔보다 더 빨간 4명의 사내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전통주 다이제스트 사상 비속어 사용 최다, 술과 무관한 이야기 최다를 기록했음을 미리 밝혀둔다. 아무튼 거국적인 술자리가 시작.

자력갱생:, 이건 뭐가 들었길래 이리 빨간 거지?

리밥에 고깃국: 쌀로 만든 증류주인데, 지초라는 게 들어가서.

편집장: 향은 어째 좀 양키스러운데?

고난의 행군: 이 계열 술들이 다소 그러하지.

자력갱생: 맛은 확실히 세다. 잘 익은 위스키 같은.

편의점에서 공수해온 보쌈과 두부, 참치다. 그럴싸한 삼합. (사진: 고난의 행군)
편의점에서 공수해온 보쌈과 두부, 참치다. 그럴싸한 삼합. (사진: 고난의 행군)

안주 등장. 이른바 편의점 삼합’.

냉장고에서 나온 수육, 생두부, 참치캔.

자력갱생: 아니, 이게 삼합이라니.

고난의 행군: 편의점에서 뭘 더 바라나. 근데 깻잎 같은 채소가 있었음 더 좋았을텐데.

리밥에 고깃국: 난 얼마 전에 홍주를 진도에서 먹었어. 이런 병입된 것 말고 집에서 직접 담근 진짜배기로.

편집장: 어쩐 일로?

리밥에 고깃국: 가서 봉사활동 겸 놀고 왔지. 할머니들 손도 잡아드리고 하면서.

자력갱생: 그럼 거기로 전입해서 선거 나가라. 바로 당선되겠네.

고난의 행군: 그래. 가서 참기름 좀 돌리고. 도지사도 될 수 있어.

편집장: 참기름이 고무신보다 낫긴 하겠다.

 

2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500ml 한 병이 바닥났다. 40도짜리 술인데.

고난의 행군: 어우, 취하는데?

자력갱생: 그게 무슨 소리야.

리밥에 고깃국: 그냥 더운 거야. 착각하지마.

고난의 행군: 아니, 독하잖아. 근데 이거 40도 짜리 뿐인가?

편집장:. 35도 짜리도 있긴 한데 대부분 40. 개인적으로 얘는 보급형으로 대중화되지 않았음 좋겠어.

자력갱생:?

편집장: 부드러움을 극대화한 안동소주나 물 타서 23도로 낮추는 문배술이 다 별로였거든. 오리지날하고 차이가 너무 커.

고난의 행군: 맞아. 막국수도 원래는 동치미 국물에 말아먹는 거였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다대기가 들어가더라고. 전주 콩나물국밥도 그래. 10년 전만 해도 맑은 국물이었는데 최근에 가보니 빨갛게 나오는 거라.

리밥에 고깃국: 성급한 대중화의 오류로군.

고난의 행군: 난 내 기억이 왜곡된 줄 알았어. 근데 먹는 거에 있어서는 그럴 리가 없는데. 그래서 직원한테 슬쩍 물어보니 서울 손님한테는 그렇게 내준다는 대답이 돌아왔어. 음식도 자기검열을 하나.

홍주와 백화수복의 만남. 야릇한 빛깔의 유혹. (사진: 고난의 행군)
홍주와 백화수복의 만남. 야릇한 빛깔의 유혹. (사진: 고난의 행군)

홍주를 충분히 만끽한 것 같아 미리 계획했던 대로 스핀오프를 즐겨보기로 한다. 준비물은 국산 정종 백화수복과 맥주.

편집장: 백화수복하고 홍주를 2:1 비율로 섞으면 홍복이라고 한대. 수없이 임상실험을 거쳐 완성된 혼합주라는군.

리밥에 고깃국:. 달다. 상대적으로

자력갱생: 조선의 작업주로군.

고난의 행군: 작업은 무슨, 안 먹을 여자는 어차피 안 먹어.

리밥에 고깃국: 근데 맥주하고 홍주 섞은 건 뭐지?

편집장: 그건 진도 선라이즈’.

고난의 행군: 아니 전남 진도라면 일출이 아니라 일몰 아니야?

자력갱생: 어차피 되도 않는 말인데 반대로 가도 무슨 상관. 어감만 좋으면 그만이지.

편집장: 그나저나 이번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평양냉면이 아주 난리도 아니네.

고난의 행군: 평양냉면이 원래 말이야...(10분간의 면스플레인, 중략)

리밥에 고깃국: 아니 됐고, 빨리 달립시다. 오늘은 스프린트해야 하는 날이야.

맥주에 홍주를 얹어 만든 ‘진도 Sunrise’. (사진: 고난의 행군)
맥주에 홍주를 얹어 만든 ‘진도 Sunrise’. (사진: 고난의 행군)

본격적인 아무말 대잔치의 지옥문이 열렸다.

편집장: 근데 평양냉면 먹는 법이 너무 성문헌법처럼 굳어져서 문제 아닌가. 의정부니 장충동이니 동네로 구분 짓는 것도 그렇고.

자력갱생: 맞아. 그런식이면 김밥도 동네마다 이름 다 달라야지.

리밥에 고깃국: 김밥천국! 김밥나라! 김밥친구!

고난의 행군: 아 그런데 왜 이놈의 치킨, 분명히 순살로 시켰는데? XX 안되겠네 여기.

자력갱생: 나 다음 주에 중국 단동 감. 옥류관 다녀올거임.

편집장: 사실 그렇게 맛있는지는 잘 모르겠음.

자력갱생: 먹어봤어?

편집장: 개성에서 먹어봤는데, 맛 자체가 많이 다르더라고.

고난의 행군: 이거 순 빨갱이구만?

편집장: 그리고 막상 북한 사람들은 우리처럼 평양냉면에 열광하는 것 같지 않더라고.

리밥에 고깃국: 그봐. 우리가 김밥천국에서 김밥 먹는 거랑 똑같다니까.

 

그렇게 준비한 홍주는 1시간여 만에 모두 소진됐다. 뭔가 임팩트 있는 마무리가 필요한 시점.

편집장: 단동 간다고 하니, 부탁 하나 합시다.

자력갱생: 김일성 뱃지라도 사오라는 건가?

편집장: 아니 그게 아니라, 대동강 맥주 몇 병만 사다줘. 한라산 소주와 대동강 맥주를 섞으면 통일소맥이 되는 거거든. 어때?

고난의 행군:, 대박이네. 이사람 뭐야. 정신이 이상해. 그런 생각을 어떻게 한 거야 대체.

자력갱생: 오케이. 내가 두어병 사올테니, 우리가 손잡고 소맥을 타봅시다. 어디 다리 위에 탁자 하나 갖다놓고.

리밥에 고깃국: 그럼 그때 BGM은 고향의 봄?

고난의 행군: 그거 받고 봄봄봄!

편집장: 마무리는 발해를 꿈꾸며!

필자소개
이창희

부(不)편집장입니다. 편집을 맡지 않았으며 편집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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