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어벤저스는 가라, 슈퍼 빌런이 나타났다
대한민국 증류식 소주의 자존심, 안동소주
게으른 어벤저스는 가라, 슈퍼 빌런이 나타났다
2018.05.04 09:51 by 이창희

마블 혹은 DC. 오늘날 슈퍼히어로물은 더 이상 어린아이들이나 즐기는 만화영화의 수준이 아니다. 다채로운 캐릭터와 그들이 빚어내는 풍부한 스토리는 다양한 변주를 거쳐 예술의 경지로 올라섰다. 권선징악의 단순한 이야기가 철학의 영역에 들어선 시점은 악당에게도 그 정당성과 설득력이 부여되면서부터다. ‘착한 놈보다 대중의 사랑을 더 받는 나쁜 놈이 등장한 그때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소개할 전통주는 히어로를 압도할 극강의 파워를 갖춘 슈퍼 빌런’, 안동소주다.

오늘의 주인공, 안동소주. 이 늠름한 자태를 보라. (사진: 드렁큰 위도우)
오늘의 주인공, 안동소주. 이 늠름한 자태를 보라. (사진: 드렁큰 위도우)

우리나라 증류식 소주 중 원톱격인 안동소주. 지금껏 소개한 전통주 가운데 인지도가 가장 높을 터다. 우리에게 안동은 익숙하고, ‘소주는 더더욱 익숙하니까. 하지만 거기까지다. 다들 경북 안동에서 만드는 독한 소주이상으로 잘 알지 못하며, 별로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동안 X’, ‘XX처럼같은 희석식 소주에 너무도 길들여져 왔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렴하고 구하기 쉽다는 건 분명한 미덕이고, 지갑 가벼운 이들의 벗이 될 자격을 갖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살림살이가 나아지고 대중의 구매력이 상승했음에도 희석식 소주는 여전히 불티나게 팔린다. 광고모델은 시즌마다 바뀌지만 술맛이 더 나아지는 것은 아니며, ‘부드러움국민건강을 위해서란 명목사실은 원료 절감으로 도수를 낮췄지만 우리들은 개의치 않고 오늘도 마신다. 가장 많은 이들이 찾는 주류계의 히어로는 언제 어디서든 나타나지만, 그 발전이나 노력에 있어서는 상당히 게으르다.

그에 비해 안동소주는 어떤가. 고두밥, 전술, 증류의 복잡하고 수고스런 과정을 거쳐서야 완성된다. 그 깊은 맛은 절기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전통 누룩 사용이 금지됐던 일제강점기, 쌀 사용을 막기 위해 제조를 탄압했던 군사독재정권을 거치면서도 명맥을 이어왔다. 대표적 전승자인 두 명인이 더 나은 술맛을 내기 위해 오늘도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안동소주가 엄청나게 매력적인 빌런이 아닐 수 없는 이유다.

안동소주 전승 ‘투톱’, 박재서 명인(上)과 조옥화 명인(下).
안동소주 전승 ‘투톱’, 박재서 명인(上)과 조옥화 명인(下).

기왕 꺼낸 김에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다. 안동소주는 현재 대한민국전통식품명인 제6호인 박재서 명인과 제20호인 조옥화 명인이 대표적 전승자다. 흥미로운 점은 두 명인의 안동소주가 제조법과 맛에서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 박 명인은 쌀로 고두밥을 만들고 쌀누룩을 넣어 전술을 빚은 뒤, 중탕 방식으로 증류해 100일간 숙성시킨다. 조 명인의 경우 멥쌀 고두밥에 밀누룩을 사용하며, 20일 발효시켜 만든 전술을 바로 증류한다. 이 때문에 전자는 부드럽고 깊은 맛이, 후자는 거칠고 강렬한 맛이 특징이다.

당연하게도 이번 주 <전통주 다이제스트>에서는 위의 2가지 버전의 안동소주를 모두 시음했다(고 쓰고 들이부었다고 읽는다).

 

WHEN: 4월의 마지막 날

WHERE: 서울 인사동 일대

DISHES: 돼지고기 숙주볶음, 순수한 계란말이

MEMBERS: 에디터 스트레인지(39·언론사 총수), 드렁큰 위도우(36·프리랜서), 편집장(본 에디터)

오늘의 선발투수다. 박재서 명인의 안동소주. (사진: 드렁큰 위도우)
오늘의 선발투수다. 박재서 명인의 안동소주. (사진: 드렁큰 위도우)

이 바닥에서 나름 쟁쟁한 글쟁이들을 한 자리에 어렵게 섭외했다. 소위 글을 팔아먹고 사는 이들이니 표현도 남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 속에 박재서 명인의 안동소주를 열어 본다. 귓가를 때리는 경쾌한 효과음, 코끝을 스치는 점잖은 향.

편집장: 향은 어때?

에디터 스트레인지: 없진 않은데, 생각보단 약하네. 소주에 인이 박혀서 그런가.

편집장: 향의 힘 자체는 느껴지는데 왜.

드렁큰 위도우: 부드러워. 선비의 도포자락 같음.

에디터 스트레인지: 그렇다면 난 엄마의 치맛자락!

 

어째 시작이 좋지 않다.

편집장: 털어넘기지 않고 천천히 음미하니 향이 더 풍성해지는 듯.

드렁큰 위도우: 확실히 맛이 있네. 좋은 술이란 게 티가 난다.

에디터 스트레인지: 이건 마치... 닌자 같다고 해야할까. 칼을 숨기고 소리 없이 나타나서 확 치고 나오는.

편집장: 탄산 느낌도 조금 있는데? 머금고 있으면 타격감이 느껴짐.

에디터 스트레인지:, 그러네. 원래 안동이 물이 유명하잖아, 탄산이 있는 광천수. 낙동강 발원지니까.

드렁큰 위도우: 그럼 오리알을 안주로 먹어야 하나?

에디터 스트레인지: 진짜 오늘 분량 안 나오겠다.

주고받는 술잔 속에 싹 트는 우애. 아니 애증. (사진: 드렁큰 위도우)
주고받는 술잔 속에 싹 트는 우애. 아니 애증. (사진: 드렁큰 위도우)

어쩐지 커져만 가는 불안감.

드렁큰 위도우: 수정방하고 비슷하다는 사람도 있더라고.

에디터 스트레인지: 수정방? 그게 뭐임?

편집장: 중국 최고급 백주(白酒).

에디터 스트레인지: 그래서 그런가 갑자기 잘 튀긴 깐풍기가 먹고 싶네.

드렁큰 위도우: 수정방을 먹어본 안동 사람이 나한테 이야기를 하는데 말야, 이게 특유의 향이 강하고 목 넘김도 묵직하고... (중략) 아무튼 그래서 내가 수정방에 대한 기억이 좋아서, 안동 소주를 꼭 마셔보고 싶었어. 뭐야, 지루해?

에디터 스트레인지:? 아니, 조금. 아니, 아니야.

편집장: 그런데. 이 소주의 가 한자로 뭔지 다들 알고 있나?

드렁큰 위도우: 알지. 황교익 선생이 이야기했잖아. 자기가 그걸로 내기해서 공짜술 많이 얻어먹었다고.

에디터 스트레인지: 뭔데? ‘술 주()’ 아냐?

편집장: 그거 말고 세 번 빚은 술 주()’를 쓴다는 건데, 알고 보면 일제강점기에서 그렇게 강제했다고 한다는군.

에디터 스트레인지:, 이 얘기 내가 한 걸로 해주면 안 됨?

반은 맞고 반은 실패한 이날의 마리아주. 돼지고기 숙주볶음(左), 그리고 순수한 계란말이(右). (사진: 드렁큰 위도우)
반은 맞고 반은 실패한 이날의 마리아주. 돼지고기 숙주볶음(左), 그리고 순수한 계란말이(右). (사진: 드렁큰 위도우)

대관절 이 술을 마시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효과라도 있는 걸까. 문득, 술의 유래가 궁금해진다.

편집장: 굳이 안동에서 증류식 소주가 발달한 이유는 뭘까?

드렁큰 위도우: 선비들이 술을 많이 마셨잖아. 안동은 선비의 도시고.

편집장: 아니, 선비야 조선 팔도에 다 있었지.

드렁큰 위도우: 도산 서원이 특히 유명하잖아.

에디터 스트레인지: 거기 도산했다며.

편집장: 그냥 집에 가고 싶다.

에디터 스트레인지: 농담이고, 안동 같은 내륙지방 사람들이 다소 고고하고 풍류에도 익숙하고, 허세도 약간 있고 그랬잖아. 그렇다보니 천천히 오래 음미하면서 마시는, 만듦새가 심플한 독주를 마시는 문화가 발달한 것 아닐까.

드렁큰 위도우: 일리가 없진 않네. 사실 다른 약주계열 전통주들은 꼭 무엇 하나씩 첨가하곤 하는데 안동소주는 그냥 잡스런 것 없이 완전 클래식하니까. 묵직하고.

편집장: 그럼 이 안주하고도 맥락이 맞네. 이 순수한 계란말이. 계란, , 소금만 가지고 만들어서 탱글탱글하고 계란 본연의 맛으로만 승부 보는.

4번 타자급 2번 타자, 조옥화 명인의 안동소주. (사진: 드렁큰 위도우)
4번 타자급 2번 타자, 조옥화 명인의 안동소주. (사진: 드렁큰 위도우)

신나게 떠들다 보니 어느새 박 명인의 술이 동났다. 교체 선수로 조 명인의 안동소주 투입. 아니 그런데.

에디터 스트레인지:, 이건 닌자가 아니라 선전포고 때리고 들어오는 군대다 군대. 존재감 작렬!

편집장: 격하게 공감. “이리오너라~” 하고 외치는 것 같아. 술이 입 안에서 칼춤을 춘다. 정말 협상 따윈 없는 매력 만발의 술이네.

드렁큰 위도우: 가장 진하게 느껴지는 건 흙맛인 듯. 흙의 향기가 싸하게 풍겨. 난 아까 것보다 이게 더 좋아. 술은 이런 임팩트가 있어야지.

에디터 스트레인지:? 토지? 박경리?

편집장: 대지? 펄 벅?

드렁큰 위도우: (깊은 한숨)

에디터 스트레인지: 아무튼, 아까 그 술이 다소 대중 친화적인 느낌이라면, 얘는 뭐 팔리든 말든 상관없다 이런 기세가 느껴져. 칠 테면 쳐봐라 난 직구다 이런.

편집장: 아까 마신 그건 100일 동안 숙성시킨 거니까, 아무래도 이게 조금 더 거친 맛이 있겠지.

드렁큰 위도우: 안동소주도 숙성시키는 동안 많이 날아가려나?

편집장: 그 날아간 걸 서양 애들은 천사들의 몫이라 부르잖아. 낭만적이야.

에디터 스트레인지: 넌 그런 쓸데없는 걸 어떻게 아는 게야?

편집장: 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옴. 그나저나 우리나라 전통주는 대부분 술병이 도자기로 돼 있어서, 줄어드는 걸 볼 수가 없어. 외국 양주는 투명해서 다 보이는데.

에디터 스트레인지: 그건... 카지노에 창문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가.

드렁큰 위도우: 넋 놓고 즐기라는 조상들의 배려인 듯.

열변을 토하는 에디터 스트레인지(의 양손). (사진: 드렁큰 위도우)
열변을 토하는 에디터 스트레인지(의 양손). (사진: 드렁큰 위도우)

뛰어난 술맛 만큼이나 이야기도 깊어간다. 취기가 얼큰하게 오르고, 장난기도 덩달아 오른다.

드렁큰 위도우: 안주는, 두부 같은 연하고 슴슴한 게 어울리는 듯. 술이 강해서 그런가.

에디터 스트레인지: 후두부?

편집장: 듣는 내가 전두엽이 다 아파오네.

드렁큰 위도우: (무시) 그런데 이거 술 금방 동나겠다. 양이 많지 않아서.

에디터 스트레인지: 동날까 안동날까.

드렁큰 위도우: (못 들은 척) 다시 마셔보니 이과두주 느낌도 조금 나는 듯.

에디터 스트레인지: 난 문과두주.

드렁큰 위도우: 조 명인의 안동소주는 누룩을 직접 만들어서 만든다고 하네. 거의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해서 쓰는 걸로 알고 있는데.(알쓸신잡의 분위기를 억지로 이어가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편집장: 뭘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만드느냐의 문제도 중요할 듯. 이스트(yeast)를 쓰는 것도 그렇고.

에디터 스트레인지: 그럼 동해안에서 만들어야 겠네.

드렁큰 위도우:, 오늘 망했다 정말.

에디터 스트레인지: 어쨌거나 총평하겠음. 이 술은, 옛 우정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음. 흙맛이 강하잖아. 흙이 뭘 의미하겠어. 다 돌아가는 거지. 초심으로. 우리 모든 추억을 묻을 수 있는 흙으로 돌아가자.

편집장: 그래. 이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살려줘.

 

필자소개
이창희

부(不)편집장입니다. 편집을 맡지 않았으며 편집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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