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未完)에서 미완(美完)으로
2000년 남북정상회담 공식 만찬주- 문배술
미완(未完)에서 미완(美完)으로
2018.04.20 15:07 by 이창희

오는 27, 역사상 3번째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린다. 만찬 여부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정상들의 귀한 만남에 좋은 술이 빠지면 섭한 일. 이번 회담에서는 어떤 술이 분위기를 돋우게 될지 관심이 쏠리는 것 또한 당연지사. 그렇다면 지난 두 차례 정상회담에서는 어떤 술이 만찬장에 올랐을까? 이번 남북한 지도자의 만남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2주간 정상회담 공식 만찬주 특집을 진행한다.

2000614, 평양 목란관에서 사상 첫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하는 만찬이 열렸다. 이 자리에 함께 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힘차게 건배를 나눈다. 두 사람의 잔에 담긴 술은 남북을 잇는 물줄기가 됐다. 본적은 북쪽이고 고향은 남쪽인 40도짜리 술. 문배술은 그렇게 역사적 현장에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2000년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 (사진: 대통령기록관)
2000년 역사적인 첫 남북정상회담. (사진: 대통령기록관)

18년 전 이야기를 들추는 이유? 그렇다. 1953년 휴전 이후 남북의 지도자가 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만난 것은 한반도를 넘어 전 세계적으로도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그들이 처음으로 건배한 술 역시 그만한 의미가 없지 않을 터. 그 명망을 등에 업고 이번 주 전통주 다이제스트의 주인공이 됐다.

문배술은 앞서 밝혔듯 평양을 중심으로 유서가 깊은 전통주다. 1000여년 전 고려시대 초기 궁중에 진상될 정도로 뛰어난 맛을 자랑했으며, 이후 대중적으로 파급돼 지금까지 전수해오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경기도 김포 통진읍에 있는 문배주양조원에서 5대를 이어 생산·보급 중이다. 알콜도수 40도의 증류주가 오리지널이지만 대중화를 목적으로 23도짜리 보급형 문배술도 생산한다.

재료는 상당히 심플하다. 누룩, , 수수가 전부다. 이는 벼농사가 발달하지 못한 평안도 일대의 지역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다. 이름의 연원은, 곡식으로만 빚은 술에서 야생 배의 향이 난다고 해서 붙었다. 믿기 어렵다고? 커피를 생각해보라. 고작 콩 좀 따다가 말려서 볶아냈는데도 과일 향이 풀풀 날리는데 하물며 술 아닌가.

실제 정상회담에서 쓰인 술은 이런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진: 문배주양조원)
실제 정상회담에서 쓰인 술은 이런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사진: 문배주양조원)

지난주 전통주 다이제스트 3화의 트리비아(여담)가 쓸데없이 장황하다는 성질 급한 독자들의 원성을 받아들여 이번 화는 특별히 짧게 마무리하기로 했다. 본래 전통은 느림과 기다림의 미학이거늘. 대신 담화를 길게 준비했다.

WHEN: 4월의 스산한 어느 날

WHERE: 서울 합정동 일대

DISHES: 평양냉면, 찐만두, 소고기무침, 이북순대

MEMBERS: 신정동 셜록(39·탐정), 마천동 언어파괴(37·국문학자), 상하이 합기도(32·격투가), 본 에디터(편집장)

문배술 23도. 보급형이다. (사진: 不편집장)
문배술 23도. 보급형이다. (사진: 不편집장)

매주 전통주를 마시는 일은 무한히 즐거운 일이나, 알맞은 장소를 선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 다행히 이번에는 적격인 곳을 발견했다. 소소한 북한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집. 아무래도 밤이 길어질 것 같아 23도의 보급형 문배술로 일단 시작해본다.

편집장: . 무색무취일 것 같았는데 무색유취네. 향이 뭐 이리 좋아?

언어파괴: 뭐 그냥 그런데? 희미해. 배 냄새는, 잘 모르겠다.

셜록: 과일 향이 나는데 왜? 코 막힌 거 아냐?

언어파괴: 내 입에는 그냥 센 소주 같아. 증류주에 물을 타서 그런가 물맛이 많이 나고.

합기도: 생수 느낌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목넘김은 좋은데?

편집장: 향은 좋지만 중국에서 먹던 백주(白酒=고량주)에 물 탄 것 같기도 하고.

언어파괴: 뭔가 부족해. 물을 타더라도, 한라산 소주 봐봐. 얼마나 임팩트가 있어.

심심했던 평양냉면과 찐만두. (사진: 不편집장)
심심했던 평양냉면과 찐만두. (사진: 不편집장)

안주가 나왔다. 평양냉면과 찐만두.

편집장: 어째 이집 냉면은 더 심심한 것 같네.

언어파괴: 다들 그거 아나? 함흥냉면보다 평양냉면 염도가 더 높대.

편집장: 에이, 말도 안 돼.

셜록: 그럴 수 있어. 육수 얼려서 내는 을X대 같은 집 가면 확연히 느껴지기도 함. , 이게 나트륨의 맛이구나 하는.

언어파괴: 맞아. 그 집 정말 별로야.

편집장: 아니 무슨, 술 이야기 하자니깐 냉면 이야기를 하고 있어.

셜록: 니가 먼저 꺼냈잖아.

진짜가 나타났다. 40도 문배술. (사진: 不편집장)
진짜가 나타났다. 40도 문배술. (사진: 不편집장)

술맛이 그닥이어서 그런지 자꾸 딴소리들이다. 부진한 선발투수를 내리고 40도짜리 오리지널 문배술 구원 등판. 그런데.

셜록: .

언어파괴: 이거다.

편집장: , 정말 강하게 때리고 들어오네. 단순히 도수 때문만은 아닌 듯. 엄청난 내공이 느껴진다.

합기도: 완전 맘에 듦. 그 왜 어릴 때 불량식품 중에 입에서 톡톡 튀는 알갱이 그런 거 있었잖아?

편집장: X?

합기도: ㅇㅇ맞음. 그 정도로 입 안에서 퍼포먼스가 대단함.

언어파괴: 굉장히 자극적이야. 문란한 맛이랄까. 기생의 콧소리 같은 그런? 아주 마음에 든다는 이야기임.

편집장: 왜 또 갑자기 19금으로 빠지시나.

언어파괴: 외로워서 그래.

셜록: 목넘김은 강렬한데, 오히려 식도를 지날 땐 여느 위스키나 보드카 같은 부담이 덜해서 좋네.

편집장: 안주랑 궁합은 좀 어때?

언어파괴: 이거 마시는 순간 아무 것도 입에 넣고 싶지 않았음. 본연의 맛이 이렇게 화려한데 뭘 더 씹는다는 건 오히려 해가 될 뿐.

합기도: 한잔 털어 넣고 나면 빠르게 휘발되면서 향긋한 내음이 확 올라오지 않음? 난 그게 꼭 안주 같아.

뒤늦게 주문한 이북식 순대와 소고기무침. 맛은 나쁘지 않았으나 40도 문배술에 존재감이 사라졌다. (不편집장)
뒤늦게 주문한 이북식 순대와 소고기무침. 맛은 나쁘지 않았으나 40도 문배술에 존재감이 사라졌다. (不편집장)

술 하나 바뀌었다고 분위기가 춤을 춘다. 역시나 술꾼들.

편집장: 그나저나, 이 문배술이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DJ랑 김정일이랑 마셨다고 하는데 말야. 당시에 한국에서 가져간 술이었는데, 김정일이 마셔보고는 문배술은 평양 주암산 물로 만들어야 제맛이라고 눙쳤다던데.

셜록: 말에 뼈가 있구만.

언어파괴: 그냥 야지(やじ, 야유·놀림) 놓은 거지 뭐. 북한 대빵들 스타일이잖어.

편집장: 그 정상회담 당시에 다들 느낌이 어땠어?

셜록: 대단하긴 했지. 곧 통일 될 수도 있다고 감격스러워하는 사람도 있고.

합기도: 세상이 바뀔 것처럼 떠들썩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이벤트성이 강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언어파괴: 난 솔직히 잘 모르겠어. 엄청났지만 그때뿐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그보다 훨씬 전에 정주영 현대 회장이 소떼 몰고 북한 올라갔던 장면이 더 인상적이었던 것도 같아.

편집장: 그러게. 그러고 보면 문배술이 그 정상회담 자체와 닮아있다는 생각도 드네. 강렬한 임팩트로 시작했지만 끝이 아쉬운.

 

그랬다. 실로 역사적인 남북의 만남이었고 엄청난 이벤트였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그 뒤로 북한은 핵개발에 매달렸고 한반도 분위기는 위태로운 기간이 훨씬 길었다. 의미는 있었지만 결실로 이어가기엔 뒷심이 부족했다.

편집장: 이제 벌써 다음 주 금요일이네.

언어파괴: 뭐가?

편집장: 3번째 남북정상회담. 이번엔 어떻게 될까?

셜록: 무조건 잘 돼야지. 사실상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어.

합기도: 정치적인 이야기는 문외한이지만, 돌아가는 분위기는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언어파괴: 또 모르는 거야. 트럼프가 어떻게 나올지도 두고 봐야하고.

편집장: 나도 응원하는 쪽이고, 또 잘 할 거라 믿고 있음. 그렇지만 이번 만찬주는 문배술 말고 뒷심도 좀 강한 녀석이었으면 좋겠음. 아름답게 말야. ?

언어파괴: 얘 자꾸 감성 터져서 이상한 비유 갖다 붙이는 것 보니 취했네. 그만 가자.

 

필자소개
이창희

부(不)편집장입니다. 편집을 맡지 않았으며 편집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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