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눗방울과 꼬마아이
비눗방울과 꼬마아이
2018.04.12 13:12 by 모자

 

안녕, 잘 지내지? 어제는 꽃구경을 갔다가 네 생각이 났어. 꽃박람회는 우리가 함께 갔던 그날처럼 맑고 따뜻했어. 발 딛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들이 꽃과 섞여서, 꽃구경을 간 건지 사람 구경을 간 건지 헷갈리는 날이었지. 사람이 너무 많아 사진 한 장 찍기도 어려웠는데 왜인지 제법 즐거운 날이었어. 오랜만의 나들이여서 그랬나 봐. 너도 잘 알겠지만 나는 집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하잖아. 그런데 어제는 뭐랄까 밖에 나와서 다행이다, 라는 생각이 들더라. 그만큼 밝고 따뜻하고 대기에 행복이 떠다니는 날이었어.

꽃박람회라는 게 사실 매년 거기서 거기잖아. 타지에서 놀러 온 관광객들로 발 딛을 틈 없이 붐비고, 죽 늘어선 가게는 이유 없이 가격이 비싸고, 매년 비슷한 꽃 장식과 작품들까지. 꽃박람회를 구경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흥미가 떨어졌어. 너도 알다시피 나는 꽃을 좋아하는 거지 박람회를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 아, 꽃은 네가 더 좋아하던가. 너는 자주 꽃다발을 들고 걸었으니까 아마 그랬던 것 같다. 함께 걸으면 품에 안은 꽃다발과 가방 때문에 네 손은 정신없이 바빴지. 핸드폰을 보려 해도 손이 모자라 내게 꽃다발과 가방 중 하나를 맡기고 다시 돌려받고 하는 바람에 덩달아 내 손도 바쁘게 움직였어. 가끔은 끊임없이 서로 물건을 주고받는 게 웃겨서 스탠딩 코미디를 하는 것 같았다니까. 어제 본 꼬마아이와 아이의 부모도 그랬어. 우리가 길거리에서 물건을 주고받던 것처럼, 비눗방울 놀이를 하는 아이는 계속해서 아빠에게 비눗물이 담긴 분홍색 통을 건넸어. 아마 통이 거슬려서 비눗방울을 만들기 어려웠나 봐. 아빠는 아이에게 통을 받아들고선 자기 손에 있던 카메라를 엄마에게 건네줬어. 카메라를 받아든 엄마는 아이의 사진을 찍었고.

아이는 참 예뻤어. 포동포동한 볼살이 빠지지 않아서 비눗방울을 불면 볼이 씰룩였어. 분홍색 셔츠와 작은 청바지가 어울렸고 키가 아빠의 허리에도 닿지 않아서 손을 높이 들어야 엄마 아빠의 손을 잡을 수 있었어. 양 갈래로 묶은 머리는 길이가 짧아서 머리를 묶어줄 때 고생을 많이 했을 거야. 엄마가 머리를 묶어줄 때까지도 아이는 잠에 취해서 눈을 감고 휘청거렸을 테고. 그만큼 조그만 아이였어. 비눗방울을 부는 것보다 손에 든 막대에 더 관심이 많은 꼬마아이. 아빠가 분홍색 통에 담긴 비눗물을 막대에 듬뿍 묻혀서 아이에게 건네면, 아이는 막대에 묻은 비눗물을 보느라 걸음을 멈췄어. 비눗물이 아이의 손을 타고 흘러내리는 바람에 엄마는 계속 휴지로 손을 닦아줬고. 엄마와 아이를 보는 아빠는 입꼬리가 씰룩거렸어. 아빠가 비눗물이 담긴 통을 놓치기 전까진 말이야. 아이를 보느라 정신이 팔린 아빠가 그만 통을 바닥에 떨어뜨렸거든. 바닥에 떨어진 통은 내용물을 바닥에 다 쏟아냈고 통을 놓친 아빠는 아이의 눈치를 보았어. 혹시 울지 않을까 하는 난처한 웃음을 지으면서.

여태껏 왜 그토록 진부한 표현들이 있는지 몰랐는데 꼬마아이를 보니 알 것 같아.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아빠와 막대와 빈 통을 번갈아 응시하는 아이의 눈동자는 정말이지 흑진주 같았어. 입을 오므리고 동그란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이 디즈니 만화에 나오는 공주랑 똑 닮았더라고. 가까이 가서 귀를 기울이면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았어. 그런데 신기하지. 아빠가 통을 놓치는 바람에 비눗물이 죄다 바닥에 쏟아졌는데 아이가 울지 않더라. 조막만한 손으로 막대를 쥐고 아빠를 쳐다보고 다시 바닥에 떨어진 빈 통을 보고, 그리고 손에 들린 막대를 보고. 아이의 시선은 계속 움직였어. 아이는 마치 지금 일어난 일이 자기랑은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이었어. 만화영화의 주인공이 길을 걷다 넘어지거나 산책을 하다가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는 것 같은 그런 표정. 마치 우와, 비눗물 담긴 통이 떨어져서 비눗물이 바닥에 다 쏟아졌어요, 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 사람들은 그들을 스쳐 지나가고 비눗물은 점점 바닥에 번지는데, 아빠는 멋쩍게 웃고 아이는 까만 눈동자를 굴리고 나는 한참 동안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지켜봤어.

그리고 네 생각이 나더라. 처음에는 네가 꽃을 좋아해서 그런 줄 알았어. 그 다음엔 바닥에 떨어진 빈 통을 보던 꼬마아이 때문인 줄 알았지. 알고 보니 그냥 네 생각이 난 거였어. 사람이 사람을 기억하는데 이유는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 같아. 원래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하잖아. 나한테는 기억해야 하는 사람이 너인 거지. 혹시 내가 비눗물이 담긴 통을 놓쳐버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더 꼭 쥐고 있어야 했는데 그러질 못했지. 바쁘다는 핑계로 여기저기 정신이 팔렸거든. 다 의미 없는 일이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까만 눈망울을 굴리는 꼬마아이를 평생 기억할 아빠와 엄마처럼 나도 널 기억할 거야. 너도 그렇겠지만. 안녕, 잘 지내. 어제는 꽃구경을 갔다가 네 생각이 났어. 그리고 오늘은 그냥 네 생각이 났어.

 

*원문 출처: 모자 지음, 『숨』, 첫눈출판사, 2018.

 

 

필자소개
모자

세상을 마음으로 관찰하는 작가. 필명 모자의 의미는 작가의 말로 대신한다. ‘모자를 좋아합니다. 모자라서 그런가 봅니다.’ 지은 책으로는 『방구석 라디오』와 『숨』이 있다. 섬세한 관찰력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꾸밈없이 담백하게 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평범하게만 느꼈던 일상이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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