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감자술, ‘선물의 정치학’
대통령과 감자술, ‘선물의 정치학’
2018.02.02 18:23 by 이창희

민족의 명절 설날이 보름여 앞으로 다가왔다. 예로부터 명절이면 지인들과 선물을 주고받는 게 우리 문화다. 대통령도 각계 인사들과 소외계층 등을 대상으로 공적인 차원에서 선물을 보낸다. 선물 자체는 단순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치·사회·경제적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지난해 추석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각계에 보낸 선물세트.
지난해 추석 당시 문재인 대통령이 각계에 보낸 선물세트.

대통령이 직접 고른 평창 서주’, 동계올림픽 성공 기원

청와대에 따르면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첫 설날을 맞아 강원 평창의 서주를 비롯해 경기 포천의 강정, 경남 의령의 유과, 전남 담양의 약과, 충남 서산의 편강 등 지역 특산품을 명절 선물로 마련했다.

서주는 감자로 빚은 평창 특산 전통주다. 개막을 앞둔 평창 동계올림픽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선정됐다. 올림픽의 의미를 살리는 동시에 명절 차례상에 올릴 술을 선물하면 좋겠다는 문 대통령의 아이디어로 알려졌다.

다른 특산품들도 각기 지역을 대표하는 것들로, 지역을 안배하는 동시에 특산품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이기 위한 취지에서 준비됐다. 내수 진작을 통해 경기 침체를 극복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추석에도 농어업인 사기 진작을 위해 경기 이천 햅쌀과 강원 평창 잣, 경북 예천 참깨, 충북 영동 피호두, 전남 진도 흑미 등을 선물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이 올해 설날 선물로 준비한 평창 서주(감자술).
문 대통령이 올해 설날 선물로 준비한 평창 서주(감자술).

선물에 들어가는 비용도 고려됐다. 선물 가액을 5만원 이하로 제한하는 부정청탁 및 금품수수 금지법(김영란법)을 준수해야 하기 때문. 과거와 비교해 달라진 풍속도라고 할 수 있다.

문 대통령의 이번 선물은 사회배려계층과 각계 주요 인사, 사회적경제 기업인, 애국지사·보훈가족·국가유공자, 포항 지진으로 인한 이재민 등 1만여명이 받게 된다.

‘YS 멸치’, ‘노무현 기준은 대통령 입맛

과거 대통령들은 어땠을까. 김영란법이 없었던 과거에는 비교적 다양한 선물들이 존재했다. 대체로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되는 경우가 많아 선물에 담긴 의미는 저마다 남달랐다.

박정희·전두환 정권에서는 인삼이 주로 선물로 쓰였다. 권위주의 시대를 반영하듯 고급 나무 상자에 봉황 문양까지 새겨 하사했다. 그 대상도 정관계 핵심 인사들로 제한됐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경우 현물 대신 떡값명목으로 현금을 건네곤 했다.

이름하야 ‘YS 멸치’. 그가 선물한 멸치를 못 먹어본 정치인은 없다는 전설이...
이름하여 ‘YS 멸치’. 그가 선물한 멸치를 못 먹어본 정치인은 없다는 전설이..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부터 지역 특산물 전성시대가 열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내내 남해안 멸치를 고집했다. ‘YS 멸치라는 별칭까지 붙을 정도로, 과거 한 원로 정치인은 정치인 치고 YS 멸치 한번 얻어먹지 않은 이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멸치가 많이 잡히는 경남 거제 출신이고 그의 선친은 한평생 멸치잡이 사업을 했다. 1993년 우루과이라운드 쌀 개방 파동이 엄청났던 당시에도 멸치 수입만큼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란 말이 떠돌았다. 그렇게 멸치는 김 전 대통령의 선물 1호 품목이자 그의 끈질긴 고집을 상징하는 존재가 됐다.

후임인 김대중 전 대통령도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전남 신안이 고향인 김 전 대통령은 남도의 대표적 특산물인 김과 녹차를 주로 선물했다. 선물을 받지 못하는 사람의 기분을 고려해 구체적인 선물 대상과 인원 등을 대외적으로 공개하지 않았던 것이 특징이다.

한산 소곡주와 전주 이강주. 술을 좋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절 선물.
한산 소곡주와 전주 이강주. 술을 좋아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절 선물.

음주를 즐겼던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전통주를 선물로 애용했다. 지리산 복분자주를 시작으로 충남 한산 소곡주, 경기 김포 문배주, 전북 전주 이강주, 충남 논산 가야곡 왕주, 전북 완주 송화백일주 등 전국의 민속주가 노 전 대통령의 이름으로 전달됐다.

지역주의 타파와 남북관계 발전이라는 그의 철학이 녹아든 선물도 있었다. 취임 첫 명절 선물로 호남의 복분자주와 영남의 한과를 함께 담아 지역감정 극복의 의미를 살렸고, 북한 금강산 호두가 선물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반면 기독교인인 이명박 전 대통령은 술을 제외하고 전국 각지의 특산물을 종합세트로 만든 선물을 즐겨 전달했다. 강원 인제 황태, 충남 논산 대추, 전북 부안 재래김, 경남 통영 멸치 등이 대표적이다.

황태, 대추, 김. 지역 특산물은 대통령 명절 선물의 스테디셀러다.
황태, 대추, 김. 지역 특산물은 대통령 명절 선물의 스테디셀러다.

박근혜 전 대통령 역시 특산물 위주의 선물 구성을 선호했다. 여기에 중소기업의 화장품 세트와 어린이 전자책 등 공산품도 있었으나 일부 품목이 비선실세최순실씨와 관련된 회사의 제품이었음이 드러나 논란이 됐다.

또한 2016년에는 박근혜 정부 출신의 조응천 더불어민주당 의원 혼자 선물을 받지 못하면서 유치한 보복이 아니냐는 논란도 불거졌다. 해당 논란에 당시 청와대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배달을 아예 취소했고, 결국 조 의원은 300명의 국회의원 중 선물을 받지 못한 유일한 의원이 됐다.

선물에 담긴 시대상 그리고 메시지

대통령의 선물에서는 그 시대의 특성과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열어젖힌 문민정부 시대에는 사회 전반의 개혁이 화두였다. 강력한 의지를 나타내야 했던 그의 고집은 멸치에 담겼던 셈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취임한 2000년대 초반에는 동서로 양분된 지역갈등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영남과 호남의 특산물을 한 선물상자에 담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언제나 관심과 화제의 대상이 되는 대통령의 선물.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담아 건네는 것이 선물이지만, 대통령이 주체가 되면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발언 한 마디, 행동 하나에 의미와 메시지가 담길 수밖에 없는 대통령에게는 선물을 고르는 선택 또한 일종의 정치적 행위다. 나아가 선물이라는 매개에 의미와 메시지를 담아 국민들에게 제시하는 것 또한 대통령의 정치력을 가늠할 기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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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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