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성명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대통령 성명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2018.01.20 23:35 by 이창희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검찰수사에 대하여 많은 국민들이 보수를 궤멸시키고 또한 이를 위한 정치 공작이자,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 보복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저와 함께 일했던 이명박 정부 청와대와 공직자들에 대한 최근 검찰수사는 처음부터 나를 목표로 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117, 이명박 전 대통령)

지난 17일 성명 발표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
 지난 17일 성명 발표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는 이명박 전 대통령.

전직 대통령이 성명을 발표했다. 재임 시절의 갖가지 의혹에 휩싸인 그가 검찰의 포위망이 좁혀들자 공식적으로 입장을 드러낸 것이다. 정치 보복이라는 항변과 함께 방어태세를 갖췄지만 다수 여론은 철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이번뿐만 아니라 역대로 볼 때 권력자가 퇴임 이후 내놓는 정치적 메시지는 대부분 변명과 핑계로 얼룩져 있다. 현대 정치사의 비극이자 부끄러운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야심찬 회심의 승부수, 실패로 돌아간 여론전

성명(聲明). 특정 단체나 개인이 어떤 일에 대한 입장이나 견해 또는 방침 따위를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뜻한다, 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쉽게 말해 주장이 담긴 목소리를 내는 행위다. 시국성명, 지지성명, 반대성명, 촉구성명 등등. 시사에 관심이 없지 않은 독자라면 심심찮게 접해봤을 터다.

성명에는 발표하는 이의 입장과 함께 향후 계획과 방향성이 담겨 있다. ‘현재 이러이러한 입장이고, 이러이러하게 생각하며, 앞으로 이러이러할 계획이다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따라서 여기에는 정확한 사실을 바탕으로 한 주장과 이를 뒷받침할 논거,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인식, 타인을 상대로 설득력을 담보할 울림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이쯤 되면 성명의 만만치 않은 무게가 느껴지는가.

이 같은 맥락에서 이 전 대통령은 성명은 적잖은 부분에서 결함이 발견된다. 우선, 사실에서 벗어난 주장이 많다. 그는 저와 함께 일했던 고위공직자들의 권력형 비리는 없었으므로 저는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자신의 친형인 이상득 전 의원을 비롯해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 등 다수의 측근 인사들이 다양한 비리 혐의로 구속되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 작업을 보수 궤멸을 위한 정치공작으로 규정한 데 이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고 주장한 대목도 공감을 얻기 어려운 내용이다. 특히 이를 많은 국민들의 시각으로 단언한 것은 여론을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성명을 발표하는 과정도 도마에 올랐다. 이 전 대통령은 짜맞추기식 수사로 괴롭힐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물으라고 말했지만 정작 현장에서 기자들의 질문에는 답변을 회피하기 바빴다. ‘이럴 거였으면 자택에서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으로 하면 되지 않았나라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 국가기록원 대통령 기록관)
이명박 전 대통령. (사진: 국가기록원 대통령 기록관)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벌인 4대강 사업과 해외 자원외교, 2롯데월드 인허가 등을 둘러싼 무수한 의혹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다스 실소유주 논란과 국정원 특수활동비 의혹도 추가됐다. 검찰은 이미 측근들을 중심으로 수사를 진행 중으로, 이 전 대통령 본인에 대한 직접 조사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번 성명이 자신의 지지 세력이었던 보수층을 겨냥해 국면을 반전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되지만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골목에서 읽거나 남이 대신 읽거나

이 전 대통령의 성명으로 다시금 주목을 받는 이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전 전 대통령은 22년 전인 199512, 서울 연희동 자택 앞에서 그 유명한 골목 성명을 발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 국가기록원 대통령 기록관)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 국가기록원 대통령 기록관)

김영삼 대통령은 5·18특별법을 만들어 저를 포함한 관련자들을 내란의 주모자로 의법처리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미 지난 13대 국회 청문회와 장기간의 검찰 수사과정을 통해 12·12, 5·17, 5·18등의 사건과 관련하여 최대한의 답변을 한 바 있고 검찰도 적법절차에 따라 수사를 종결한 바 있습니다. 저는 검찰의 소환 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여타의 사람들에게 대한 정치보복적 행위가 없기를 희망합니다.”

당시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 검찰은 전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내란죄 혐의로 수사 중이었다. 이에 반발한 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집 앞 골목에서 이 같은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이틀 뒤 고향인 경남 합천으로 몸을 피했으나 결국 구속됐다.

지금까지도 당시의 성명이 회자되는 가장 큰 이유는 잘못에 대한 반성이 전무했다는 점이다. 그는 민주화 인사들을 비롯한 많은 이들을 억압하고 목숨을 잃게 만든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을 과시했다. 국민적 분노를 한 몸에 받았음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 청와대)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 청와대)

이에 못지않게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독 성명도 유명세를 떨쳤다. 헌정 사상 처음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탄핵된 박 전 대통령은 지난해 3월 자신의 최측근인 민경욱 자유한국당 의원을 통해 성명을 발표했다.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를 믿고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민 의원이 박 전 대통령의 서울 삼성동 자택 앞에서 대독한 성명의 내용이다. 짧은 성명이지만 진실이 밝혀진다고 믿는다는 대목에서 여전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사과의 이유는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으로 한정했다.

 

말의 무게, 품격의 무게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전두환까지. 전직 대통령들의 퇴임 후 성명은 대부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은 누구보다도 억울하고, 정치보복의 희생양이며,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의지까지.

한때 국정을 담당했던 국가 지도자들이다. 자리에서 물러났어도 정부를 이끌었던 경험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에 봉사할 의무가 있기에 국가 차원의 예우가 법에 명시돼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가볍게 던지는 말 한 마디도 시기와 상황에 따라 엄청난 여파를 불러올 수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성명에서 위상에 걸맞는 품격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의 말 속에 무게를 갖추지 못했고, 자신을 선출한 국민들에 대한 예의를 다하지 못했다.

 

필자소개
이창희

부(不)편집장입니다. 편집을 맡지 않았으며 편집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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