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
광기
2017.01.18 15:05 by 오휘명
(사진: Julie July/shutter.com)

“글쎄, 그렇게 술에 떡이 돼서 남의 집에 찾아오는 걸 보면, 자네도 그렇게 예의 바른 후배는 아닌 것 같군.”

늙은 화가는 이젤을 바라본 채로 나지막이 말했다. 화난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서 있는 남학생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앉아, 싸가지는 없어도 손님 대접은 해주지.”

*

대학교 어떤 학과의 총동문회라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예술대학, 그중에서도 회화과의 총동문회에는 엘리트 의식에 찌든 사람들이 주로 참석하곤 했었다. 얼마 전 커다란 화랑에서 며칠간 개인전을 열었던 중견 화가, 해외에서도 각광받고 있는 전도유망한 신인, 여러 미술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이들이었다. 남학생은 어느 학번의 대표 학생으로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말이 ‘학번 대표’로 번지르르할 뿐, 소위 잘 나가는 선배들의 술 수발을 드는 것이 하는 일의 대부분이었다고 봐도 좋았다.

“아르바이트도 뛰어가면서 작업을 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요.”

“네, 네. 선배님, 선배님도 이렇게 지쳤던 때가 있으셨나요?”

온통 그런 질문들이었다. 이 자리 저 자리의 선배들에게 그런 비슷한 질문들밖에 할 수가 없었다. 돌연 어디에선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힘들면 뭘 어쩌긴 어째. 닥치고 계속 그려야지.”

일순 행사장 안의 모든 시선들이 소리의 근원지로 쏠렸고, 술 냄새와 함께 왁자지껄했던 분위기는 푹 죽어버렸다. 그곳에는 듬성듬성 흰 머리가 난 늙은 남자 한 명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옷차림은 밑단이 헐어버린 청바지와 계절에 맞지 않게 얇은 재킷 차림이었다.

“뭘 그렇게들 쳐다봐? 내 말이 틀렸어? 그림이 잘 그려지는 비결 같은 게 어디 있어. 니들은 그걸 알아서 출세했고, 난 여태 멍청하고 그걸 몰라서 방구석에서 안 팔리는 그림이나 맨날 그리고 있는 거냐고.”

남학생과 대화를 나눌 때는 한껏 가슴을 편 채로 당당하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이들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내리깔았고 다른 누군가는 굳은 표정으로 회장에서 나가기도 했다. 아마 이곳에서 잔뼈가 굵은 모양인 것 같았다. 그 노인은 술잔에 남은 술을 들이켜더니, 에이, 어리고 나약한 새끼, 말하고는 회장을 나섰다. 남학생은 그 한 마디가 자신을 향한 화살이었음을 알고는 얼굴색을 확 붉혔다.

*

동문회장의 사람들이 권하는 술도 모조리 얻어먹었겠다, 당시에 느꼈던 창피함도 다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겠다, 그럼 도대체 그림을 어떻게 그려가라는 거야, 힘든 건 힘든 거잖아, 하는 억울함이 치밀어 남학생은 그 노인의 집에 다짜고짜 찾아온 것이었다. 학생회에서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동문들의 주소나 연락처 따위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노인의 집은 서울의 아주 외곽 쪽에 있었다. 아니, 차라리 시골이라고 부르는 곳이 더 어울릴 만한 곳이었다. 오래되어 볼품없는 집의 문을 두드리니, 노인이 철문을 빼꼼 열어 쳐다보고는 아까 그 겁쟁이 새끼구먼, 하고는 도로 집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남학생은 한껏 더 열이 받아 노인을 따라 들어간 것이었다.

“그래서, 여기까진 굳이 뭘 하러 찾아온 건데?”

늙은 화가는 이젤 주변에서 일어나 싸구려 녹차를 타기 시작했다. 유화 물감의 독한 냄새와 차 우리는 냄새가 이상한 제3의 냄새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내가 미술을 배우면서 얼마나 힘든지, 배움 외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요소가 얼마나 많은지도 모르면서 나를 ‘나약한 새끼’라고 부르고, 닥치고 그림이나 그리라는 말을 한 이유가 뭔지 궁금해서 왔습니다.”

화가는 남학생에게 찻잔을 건네곤 자신의 찻잔을 들고 도로 이젤 앞에 앉았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젤에 걸린 캔버스 안에는 온통 붉은 톤으로 그려진 사람들의 얼굴이 있었다. 흡사 악마들을 보는 것 같기도, 망자들이 고통받는 지옥을 보는 것 같기도 했다.

“말 그대로야. 여러모로 힘든데 그래도 그림을 그리는 게 좋으면, 그냥 일단 그리면 되는 거 아니냔 말이야. 한심해서 웃음이 나올 정도더군, 그리고 대충 봐도 내가 선배인 것 같은데, 말을 편하게 하는 것에 대해 불편한 점이라도?”

남학생은 뻣뻣한 자세로 앉아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씩씩거리는 기색 역시 누그러들어 있었다. 늙은 화가가 그리고 있는 그림의 아름다움과 심오함에 매료된 나머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화가는 남학생의 시선을 눈치라도 챈 듯 말을 이었다.

“잘 그리지? 봐봐, 계속 그리면 이렇게 된다니까. 집이 아무리 허름하고 반찬이 몇 개 없어도, 그냥 닥치고 그리기만 하면 실력은 올라간다니까. 이게 니가 바라는 거 아니야?”

남학생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생계가 제 생명을 위협하면 어쩌죠, 남학생은 여전히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캔버스에 시선을 고정하고 멍하니 말했다. 화가가 대답했다.

“어쩌긴, 굶어 죽거나 하는 거지. 다만 거기서 살아남으면 전설이 되는 거고.”

남학생은 왠지 그의 말이 굉장히 믿음직스럽다고 느껴, 그만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씩씩대며 집에 쳐들어온 것이 방금 전인데.

“그나저나, 물어볼 게 더 없으면 그만 꺼져주지그래? 이 그림이 보기엔 훌륭해도 아직 완성되려면 멀어서.”

남학생은 또다시 홀린 듯이 일어나 들어온 철문을 향해 걸어갔다. 돌아서서 꾸벅 인사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 저, 선생님. 실례지만 성함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화가는 여전히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로 매섭게 대답했다.

“나는 광기, 광기라고 하지. 사람들은 간혹 다르게 부르기도 하지만.”

*

가신 줄 알았던 술기운이 도졌던 것이었을까, 화가의 목소리를 들음과 함께 남학생의 의식은 희미해져갔고, 잠에서 깨었을 때 그는 그의 방에 식은땀을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텅 빈 냉장고에서는 요란한 모터 소리가 나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에서는 어디선가 봤었던 것 같은, 온통 붉은색으로 점철된 얼굴들이 그려진 캔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지옥 같기도, 악마들 같기도 했다. 남학생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손에는 붓과 팔레트가, 팔레트에는 온통 붉은 유화물감이 칠해져 있었다.

광기였다.

 길 건너 그분들의 사연  세상의 모든 존재들, 나와 나의 주변 ‘것’들이 각자 간직한 마음과 사연. 그 사연들을 손 편지처럼 꾹꾹 눌러 담아 쓴 초단편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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