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폭염이란 기사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몸이 먼저 느낀다. 지치고 짜증나는 무더위 말이다. 다 팽개치고 시원한 바닷가로 떠나고 싶은 마음 굴뚝이다. 시퍼러 둥둥한 바닷 속에 둥둥 떠 있는 생각만으로도 벌써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물놀이도 좋지만, 사실 진짜 시원한 건 바닷가의 옷차림새다. 상상만으로도 흐뭇하지만, 막상 직접 마주하면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모른다.(선글라스가 해변의 필수템인 건 그래서 일수도) 그 중에서도 비치룩의 꽃은 단연 ‘비키니’다.
“결혼 반지 사이로 빼낼 수 없으면 진짜 비키니가 아니다.”
비키니를 최초로 발명한 프랑스 출신 디자이너 루이 레아드가 한 말이다. 그만큼 단출한 천 쪼가리로 만들어졌단 얘기. 비키니가 만들어진지 70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파격적인’ 의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다. 파란 원피스 수영복만 고집하던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서도 1957년 개최 이래 58년이 지나서야, 최초로 비키니 심사를 감행했다.(2014년)
사실 비키니를 볼 때면, 여성들의 심리가 궁금했다. 속옷과 똑같아 보이는데… 비키니를 입은 여성들은 자신감이 넘친다. 물론, 여성들이 남자들 보라고 입는 건 아닐 거다. 남자들은 모를 여러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눈길이 가는 걸 붙잡긴 힘들다. 여성들도 이를 애써 부인하진 않을 것이고.
처음 비키니가 만들어졌을 땐 어땠을까? 모르긴 몰라도, 꽤나 ‘쇼크’였을 거다. 실제로 1946년 당시에는 영화에서 여성의 배꼽만 나와도 외설적이라며 금지되던 시기였다. 그런데 중요 부위만 가리고 온 몸을 드러낸 비키니라니…
루이 레아드는 그의 작품을 입으려는 모델이 없어, 드 파리 클럽의 누드댄서 미셸 베르나르디니를 설득한 끝에 간신히 비키니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1946년 7월 5일 파리에서 비키니를 발표할 수 있었고, 이는 곧 ‘핵폭탄’급 이슈가 되었다.
그런데 실제 ‘비키니’라는 이름은 핵폭탄과 관련이 있다. 비키니가 발표되기 나흘 전인 1946년 7월 1일, 미국은 태평양의 한 섬에서 핵실험을 강행했다. 2차 대전이 끝난 지 1년 후라, 이 핵실험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 핵실험을 강행한 섬이 바로 서태평양 마샬 군도에 위치한 ‘비키니(Bikini)’섬이다.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이 실험은 파격적인 수영복의 이름을 ‘비키니’로 짓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루이 레아드는 자신의 작품이 큰 파장을 일으킬 것을 알았고, 그에 적합한 이름이 찾다가 핵실험으로 떠들썩했던 비키니 섬의 존재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데 비키니는 그 쇼킹함에 비해선, 그다지 사랑을 받지 못했다. 당시 보수적인 사회적 관념 탓이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국가는 비키니 입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기도 했다. 거의 10년 간 패션계의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외면 받던 비키니가 대중적으로 퍼지게 된 것은 60년대부터다. 1960년 브라이언 하일랜드가 비키니를 주제로 부른 노래가 히트를 치면서, 젊은이들 사이에 비키니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Itsy bitsy teenie weenie yellow polka-dot bikini’라는 제목의 노래로, 비키니를 생전 처음 입은 아가씨가 부끄러워서 탈의실에서 나가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처음 비키니가 나왔을 때, 제조업자들은 “미국 여성들은 지나치게 별난 저런 옷은 절대 입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마르고 뚱뚱하고를 떠나, 임산부까지 입는 세상이 됐다.
다들 편히 입는 시대가 됐다지만, 사실 아직 마음 놓고 쳐다보진 못한다. 물론 나만 그런 거일 수도 있다. 만약 나만 그런 것이라면 꼭 말해줬으면 좋겠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니까, 나도 변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