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 소식을 듣고 알바 하다가 울었어요.”
‘힙합비둘기’ 데프콘이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대한민국 1세대 래퍼로 통하는 그의 눈물샘을 자극한 이는 다름 아닌 ‘투팍(2pac)’. 그 뿐만이 아니다. 힙합 레이블 ‘AOMG’의 수장 박재범은 “투팍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래퍼”라고 했으며, 힙합씬의 무서운 신예 ‘나플라’는 “투팍의 노래 ‘Changes’를 들으며 음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회상했다.
래퍼들이 가장 사랑하는 래퍼, 투팍. 45년 전 바로 오늘(6월 16일) 태어난 그를 기념하며 진정한 ‘갱스터’ 투팍을 들여다 봤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힙합은 마니아 음악에 가까웠다. TV 음악방송에선 노래 중간 중간 들어가 심심한 부분을 매워 주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다. 그 당시 힙합이라는 건 음악의 한 장르라기보단 그저 말을 빨리하는 일종의 ‘방식’에 불과했다. 하지만 에픽하이, 리쌍, 다이나믹 듀오 등을 중심으로 대중적인 힙합이 인기를 얻으며 힙합과 더불어 래퍼들 개개인의 주가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2012년 엠넷이 <쇼미더머니>를 방영했을 때 사람들은 흔한 오디션 프로그램의 힙합 버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시즌이 거듭될수록 인기를 얻더니 지금은 그야말로 대세가 됐다. <쇼미더머니>가 방송된 다음 날엔 각종 포탈과 음원차트를 출연 래퍼들이 점령한다. 많은 오디션프로그램이 사라지는 와중에 <쇼미더머니>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게 인기의 방증이기도 하다.
(사진: 쇼미더머니5 공식 페이스북 페이지)
그런 쇼미더머니에서도 유독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바로 ‘투팍’이다.
투팍은 어떻게 수많은 래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됐을까? 많은 래퍼가 투팍을 ‘리스펙’하게 된 이유는 도대체 뭘까?
여전히 힘들고 사는 건 어려워, 투팍 이제는 내게 말해줘 어서! (래퍼 ‘졸리브이’의 노래 <to NAS> 중)
거칠 것 없는 사회적 메시지
투팍의 본명은 ‘투팍 아마루 샤커(Tupac Amaru Shakur)’. 그는 연기를 전문적으로 배웠던 연기자이기도 했다. 래퍼로서 독보적인 클래스에 오르면서도, 연기재능까지 있다는 게 이 아티스트가 가진 예술적 재능을 잘 보여준다.
투팍이 출연했던 영화 <갱 릴레이션> 스틸 컷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10대 초반부터 극단에서 활동했고, 볼티모어 예술학교에서 연기와 발레를 배우기도 했다. 1988년 캘리포니아 주 마린시티로 이주해서는 힙합그룹의 공연 매니저 겸 댄서로 일했다.
첫 음악 작업은 1991년 개봉한 영화 <난폭한 주말> OST에 객원래퍼로 참여한 것.(이 영화엔 직접 단역배우로 출연하기도 했다.) 여세를 몰아 같은 해 정식으로 솔로앨범을 냈다. <투파칼립스 나우>(2Pacalypse Now)라는 데뷔 앨범은 당시 빌보드 앨범차트 64위까지 올랐다.
대중적 인지도만큼, 문제도 많이 일으켰다. 1993년 10월엔 애틀랜타 경찰관에게 총을 쏜 혐의로 기소됐고, 그해 11월에는 성폭행 혐의로 다시 기소되기도 했다. 성폭행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은 투팍은 치료를 마친 후 1995년 2월부터 복역했다. 그런데 한 달 뒤인 3월, 세 번째 앨범 <me against the world>가 빌보드 앨범차트 1위에 오른다. ‘역사상 최초로 감옥에서 수상한 래퍼’라는 타이틀은 이렇게 생겼다.(‘The Anecdote’로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상을 받은 ‘이센스’의 옥중수상 선배라 할 수 있다.)
투팍의 노래는 단순히 돈이나 성공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세상에 대한 분노, 세상을 떠난 흑인들에 대한 애도와 자아 성찰, 폭력문제 같은 것을 농도 짙게 표현한다. <Dear Mama>를 통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기도 했다.
3집<Me Against The World>
4집 <All Eyez On Me>
서부와 동부의 디스전, 중심엔 투팍이 있었다
투팍은 죽었다.(1996년 9월 13일) 총에 맞아 사망했단 것만 알려졌을 뿐, 여전히 누구에 의해 죽은 건지는 알 수 없다. 그가 떠난 지 몇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의 죽음은 의혹에 머물러 있다. 가장 큰 의혹의 눈초리는 역시 투팍의 라이벌 ‘노토리어스 비아이지’(일명 ‘비기’)에게로 향한다. “비기의 사주‘라는 설도 파다하다.
투팍이 웨스트코스트를 대표하는 래퍼였다면 비기는 이스트코스트를 대표하는 래퍼다. 투팍과 비기의 관계는 뉴욕 맨해튼 한 녹음실에서의 총격으로 악화된다. 누군가 투팍에게 다섯 발의 총탄을 쐈는데 복부에 세 방, 머리에 두 방을 고스란히 맞았다. 하지만 투팍은 세 시간 만에 퇴원하며 세상을 놀라게 한다. 마치 영웅처럼 말이다. 그리고 모든 의혹의 화살이 비기에게로 쏠린다.
이 사건 뒤로 동부와 서부 힙합씬의 갈등은 악화된다. 그리고 발표한 노래가 바로 <hit ‘Em up>이다.(디스의 수위가 굉장히 세기 때문에 여기 옮길 수조차 없다.) 물론 비기는 끝까지 아니라는 입장으로 일관한다. “투팍의 피살과 본인은 절대 무관하다”는 것이다.
<hit ‘Em up> 뮤직비디오, 각양각색의 욕설이 난무하는 강도 높은 디스 송이다.
그로부터 몇 개월 뒤, 투팍은 타이슨과 브루스 셀던의 권투 시합을 관람하고 ‘데스 로 레코즈’가 운영하는 클럽으로 이동하던 중 차량 총격을 당해 사망한다. 그해 11월 ‘마카벨리’라는 예명으로 만든 첫 유작 <The Don Killuminati: the 7 day theory>를 출시했고,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한다.(투팍이 죽은 지 6개월 뒤, 비기 역시 의문의 총격으로 사망했다.)
자신의 음악만큼 극적인 삶을 살았고, 극적으로 세상을 떠났던 투팍. 그가 레전드가 된 비밀이 바로 거기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