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세스 2세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규모가 어마어마합니다.(반면에 디테일한 부분에 있어선 확실히 세련미가 좀 떨어집니다), 하지만 그의 건축물들이 많은 이들의 관심을 끄는 건 그 거대한 규모 때문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뭔가 드라마틱한 면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람세스 2세가 공을 들인 이곳 라메세움도 예외는 아닙니다. 가장 거대한 규모로 가장 화려하게 지어졌던 이 신전은 아마도 당대에는 그야말로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말 그대로 폐허가 되어 있기 때문에 원래의 그 당당했던 신전의 모습을 상상해보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물론 우리가 얼마전 다녀온 메디넷 하부의 람세스 3세 장례신전을 바탕으로 라메세움의 원래 모습을 어느 정도는 복원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라메세움을 모델로하여 지었고 보존 상태가 훨씬 좋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그 학술적인 복원에 대한 이야기는 좀 피하고 싶습니다. 이곳 라메세움에는 남아 있는 폐허를 있는 그대로 느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탑문은 절반 쯤 무너져내려 있고, 신전 벽과 석상들 대부분은 온데간데 없지만, 이 신전이 지니고 있던 특유의 장중함은 이렇게 신전이 폐허로 변해버린 지금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폐허가 되어버린 이후에 그 장중함이 더 커진 것 같기도 합니다. 마치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인생을 바친 한 남자가 결국에는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서글프게 소멸해간 이야기처럼… 공허하면서도 비장한 장중함 같은 것이 느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메세움에서 만큼은 앎의 욕구에 이끌려 이곳저곳을 면밀히 둘러보며 진지해지기 보다는 홀로 여유롭게 신전을 거닐며 깊은 침묵에 잠겨보는 것은 어떨까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이 쓸쓸한 폐허, 오히려 폐허라서 감수성을 더 자극하는 이곳에서 우리는 지적인 욕구와 그 욕구가 해결됨으로 얻어지는 즐거움을 추구하기보다는 어쩐지 삶과 인생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니다. 앎의 즐거움도 굉장한 것이지만 사실 깨달음의 즐거움에 비하면 그 즐거움은 보잘것 없습니다. ‘깨달음’은 우리가 여행을 하는 많은 이유들 가운데 가장 커다란 것입니다.
라메세움은 신전의 엄청난 규모와 이제는 처참하게 무너져버린 람세스 2세의 거대한 석상으로 인하여 유럽인들에게 유명세를 얻었습니다. 웅장한 규모의 신전이야 룩소르 신전이나 카르낙 신전 그리고 우리가 얼마전에 다녀온 서안의 메디넷 하부에서 훨씬 더 보존이 잘된 상태로 만날 수 있고, 또 이미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에서 신전의 원래 규모를 가늠한다는 것도 어쩐지 조금은 우스워보이지만, 오지만디아스(Ozymandias)라고 불리는 – 오지만디아스는 람세스 2세의 그리스식 이름입니다 – 그 거대한 석상은 여전히 만나볼 수 있습니다. 물론 폐허인 이곳에서 우뚝 솟아 있는 석상은 어울리지 않겠죠. 당연히 석상은 이미 오래전에 쓰러져서 현재는 땅위에 누워 있습니다. 얼굴은 사라져버린지 오래지만 어쩐지 여전히 오만한 모습을 하고 있는 오시리스 기둥들을 조심스럽게 지나게 되면 우리는 마치 우리가 찾아오기를 수천 년이나 기다리다 이미 지쳐버렸다는 듯이 신전 안쪽에 누워있는 위대한 왕, 람세스 2세를 만나게 됩니다. 영원을 꿈꾸었던 람세스 2세는 이곳에서 무너져버렸습니다. 라메세움은 수천 년에 이르는 세월의 힘이 한 인간의 위대한 도전을 좌절시킨 현장입니다.
고대 이집트가 열정적으로 동경되었고, 또 그래서 고대 이집트 탐사가 부유층의 취미였었던 지난 시절, 이 좌절의 현장에서 영국의 낭만파 시인 P. B. 셸리는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나는 고대의 나라에서 온 한 여행객을 만났다.
그는 말했다.
몸체가 없는 거대한 돌의 다리 두 개가 사막에 서 있다고
근처의 모래 위에, 깨어진 사람의 얼굴이 반쯤 묻힌 채 놓여있다고
인상쓴 표정, 주름진 입술,
그리고 차갑게 내려다보는 조소에서는 조각가의 열정을 읽을 수 있다고
생명 없는 그것에 각인된 그것을 빚어낸 손과 다듬어낸 심장의 고동은 여전히 살아 남아 있다고
그리고 받침대에는 이런 문구가 남아 있으니
나의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중의 왕,
모든 위대한 자들아 나의 업적을 보아라.
그리고 절망하라.
- 오지만디아스, P 셸리 -
라메세움 신전은 람세스 2세가 영원에 도전하며 외쳤던 자신감 넘치는 외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폐허가 되어버린 이곳에서 우리는 수천 년의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버려 겨우 폐허로만 남겨진 한 사내의 열망을 겨우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세월의 무게를 이겨낼 수 없다는 씁쓸한 사실을 다시금 실감하게 되는 이 순간, 여러분은 어쩌면 조금은 우울해지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자, 이 자리에서 인생무상을 서글퍼하며 이미 사라져버린 위대한 것들 추억해봅시다. 물론 분명히 위대했던 한 사내의 영원한 안식도 함께 기원하면서 말이죠.
/사진:곽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