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 야구 불변의 법칙
기적, 야구 불변의 법칙
기적, 야구 불변의 법칙
2016.06.01 18:03 by 김상욱

이제 이틀 후면 대망의 한국-라오스 친선 야구 대회가 열립니다. 날씨는 여전히 싸늘했지만 선수들은 연습에 여념이 없는데요. 포수 출신 이만수 감독이 한 쪽 구석에서 라오 브라더스 포수에게 포수의 역할에 대해서 열띤 설명을 합니다. 덩달아 선수들이 하나둘씩 모여듭니다. 여긴 늘 이런 분위기입니다. 쉬는 시간에 한 명한테 뭔가 가르쳐 주면 어느 순간부터 줄줄이 소시지처럼 계속 선수들이 모여드는 거죠.

분명히 한 명만 불렀다. 똑똑히 들었다. 한 명만 부른 것을...

그런데 이만수 감독에게 포수 자세를 지도 받는 선수가 유독 체격이 왜소했습니다.(물론 라오 브라더스 선수들 대부분이 왜소합니다) 하지만 어려 보이는 얼굴에 비해 설명을 듣는 표정만은 매우 진지합니다. 그리고 유난히 한국적인 얼굴이라 친근감마저 느껴집니다. 이 선수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라오스 판 살인미소 작렬!

‘야구가 살린 생명’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서 차로 20시간 걸리는 시골마을 ‘우돔싸이’

그곳에서 ‘에예(16세)’는 할머니와 단둘이 살았습니다.(이름이 ‘에예’랍니다) 에예 부모님의 살림은 열악했습니다. 하루에 한 끼를 제대로 챙기는 것도 힘들었죠. 결국 아이는 4살 때 할머니에게 보내졌습니다. 살림이 어려운 건 할머니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루 삼시 세 끼는 사치였죠. 한창나이에 제대로 먹지도, 제대로 사랑받지도 못 해서 일까요? 에예는 체격이 많이 왜소하고 말투도 어눌합니다. 게다가 감정 기복이 심하고 혼잣말까지 하는 아이로 자랐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할 게 없는 시골이라 ‘멍하게 보내는 시간들’은 에예를 더 고독한 아이로 만들었습니다. 혼잣말을 하는 버릇도 이때 생긴 겁니다. 주변에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이야기를 한 거죠.

그러던 중 에예는 동네 지인을 통해 비엔티안에서 야구라는 스포츠의 선수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게 됐습니다. 하지만 에예는 차로 무려 20시간이나 떨어진 낯선 곳에 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차비도 없었고 비엔티안에서 있을 곳도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비엔티안까진 올 수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습니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고 명확한 계획도 세울 수 없었죠. 그저 ‘지금보다는 낫겠지’라는 마지막 끈을 찾아서 라오 브라더스 야구단 테스트에 온 것입니다.

초기 입단 테스트 당시 참가자들 지원서 작성 모습

라오 브라더스 선수들을 선발했던 현지 교민 제인내씨는 입단 테스트 때의 에예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엔 에예의 느릿한 행동이 단순히 야구가 서툴러서라고 생각했죠. 선발하고 나서야 에예의 어눌한 말투, 감정 기복 등을 구체적으로 알게 됐어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는 에예를 보면서 다시 돌려보내야 하나 싶을 정도로 당황스러웠습니다. 게다가 예의도 너무 없었어요. 그래서 저는 에예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질까 봐 조마조마했습니다.”

차로 20시간 걸리는 곳에 살았던 예에는 현재 ‘야구 센터’라는 곳에서 지낸다고 합니다. 선수들이 몸을 푸는 작은 훈련공간인데, 집이 먼 선수들을 위해 여기에 조그마한 숙소를 만들어준 것이죠.

'기적이 시작됐다'

훈련하고 있는 에예를 보면서 제인내씨가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에예의 말투, 행동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이거 뭐지?’ 싶었어요. 에예를 선발 테스트에 데려왔던 동네 사람도 와서 보더니 놀라더라고요. ‘도대체 그동안 에예한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더라고요. 에예의 변화된 모습에 저도 그 분도 놀란 거죠. 기적이에요. 과학적으론 설명이 안되니 기적이라는 단어 외에는 적당한 말이 없습니다. 제가 그 분한테 야구 때문이라고 했더니 언제 연습하냐고 되묻더군요. 자기도 오고 싶다고요. 하하”

저는 훈련 중인 에예를 유심히 관찰해 봤습니다. 포수 포지션을 맡고 있는 에예의 플레이는 생각보다 빠르고 간결했습니다. 라오스어를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에예의 말투는 거의 정상적으로 느껴졌습니다.

포수 장비, 저랑 잘 어울리지 말입니다.

무엇보다 우직한 성품이 동료들 간에 큰 신뢰를 얻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구의 안방마님이라 불리는 포수 포지션을 맡고 있는 거죠. 처음 에예를 봤을 때 불안해하던 제인내씨도 이제는 에예를 너무 신뢰한다고 합니다.

“에예는 그 나이 때 아이들이 가끔 하는 사소한 거짓말도 절대 하지 않아요. 그리고 한 번 시킨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죠. 그래서 에예에게 주방관리도 맡겼어요. 역시나 철저하게 관리하더군요. 하하. 여기서 주방관리는 정말 중요하거든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야구를 통해 에예를 다시 달리게 했습니다.

제가 에예에게 물었습니다. “너 꿈이 뭐니?” 에예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나중에 우리에게 멋진 야구장이 생긴다면 그 야구장을 제가 직접 관리하고 싶어요.”

“야구는 안하고 야구장 관리만?”

“물론 라오 브라더스 포수로서 팀을 이끌어야죠. 동시에 야구장도 관리하는 책임자가 되고 싶어요”

한국식으로 치면 ‘총무’ 기질이 다분한 에예를 보면서 정말 야구를 통해 누군가의 삶에 기적이 일어난 것을 눈앞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받지 못한 채, 가난하고 하릴없이 지내면서 생겼던 마음의 병.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야구를 시작한 이후로 에예의 몸과 마음이 점점 더 좋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식을 뛰어넘어 이뤄진 것을 기적이라고 부르죠. 물론 흔히 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저는 그런 기적을 이곳 라오 브라더스 선수에게서 본 것입니다.

나 이제 혼자가 아니에요. 동료들하고 대화한답니다.

에예에게 야구란, 답이 보이지 않던 절망의 나날들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해 준 탈출구였습니다.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에예의 인생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고 방향이라고 하죠. 이제야 조금씩 잡혀가는 에예 인생의 방향이 앞으로도 계속 라오 브라더스와 함께하기를 소망합니다.

‘엄마는 따로 있었다’

웬 낯선 여자가 저에게 한국말로 “안녕하세요”를 외칩니다.

너무 정확한 발음 때문에 저도 모르게 “한국 사람이에요?”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저를 외면하고 야구 연습장으로 휑하니 가버렸습니다. 이게 바로 라오 브라더스 선수들의 엄마 같은 존재 ‘응언’과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워낙에 밝고 활기찬 성격 때문에 낯선 외국인인 저를 보고 먼저 크게 한국말로 인사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사 외에는 한국말을 잘 모르기 때문에 제 질문에 대답을 못하고 그냥 지나쳤던 거였습니다.

맨발의 청춘, 응언

응언의 나이는 17살입니다. 응언을 오래 지켜본 제인내씨의 말로는 응언은 시간을 절대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혼한 언니와 사는 응언은 매일 새벽 4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일 나가는 언니 대신 밥을 짓고 어린 조카들을 학교에 데려다줍니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전교 1등까지 했답니다.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선도부도 한다고 하네요. 학교가 끝나면 무조건 라오 브라더스 훈련장으로 직행해서 구슬땀을 흘립니다.

라오브라더스 선수들이 훈련하는 광경 속에서도 응언은 여러모로 눈에 뜨입니다. 첫째, 남자 선수들을 능가하는 운동 능력입니다. 자세를 보면 운동실력을 알 수 있는데 응언의 뛰는 폼은 ‘달려라 하니’를 능가합니다. 심지어 수비 훈련 때 동료의 1루 송구를 방해하지 않으려고 옆구르기까지 선보입니다. 둘째, 훈련 중에 동료 선수들을 독려하려는 응언의 목소리는 유독 큽니다. 제인내씨가 선수들을 불러서 훈련 중 문제점에 대해 한마디 하면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수들에게 열 마디를 합니다.

한국-라오스 친선대회를 앞두고 훈련하는 응언

훈련이 끝나고 제인내씨에게 물어봤습니다.

“아까 응언이 선수들에게 뭐라고 한 거죠? 꽤 길게 말하던데요”

“사실 선수들이 조금 지쳤어요. 며칠 후에 있을 한국-라오스 친선대회 때문에 훈련시간을 좀 늘렸거든요. 그런데 선수들이 힘들어하기에 제가 한 마디 했어요. ‘열심히 하자!!’라고 딱 한 마디요. 그랬더니….”

“그랬더니요?”

“응언이 그러더군요. ‘야구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주어졌는데 왜 열심히 안 하냐? 아무리 힘들어도 목소리 더 크게 하고 더 힘차게 던지고 뛰고 해야지. 한국에서 사람들이 우리를 보러 왔는데 이러면 되냐?’ 뭐 이런 내용이었어요. 제가 괜히 속으로 뜨끔하더군요. 하하”

저는 처음에 응언이 주장인 줄 알았습니다. 훈련할 때 워낙 활동량이 많고 훈련장 밖에서도 늘 솔선수범하니까요. 그런데 응언은 주장이 아니고 엄마였습니다. 선수들의 엄마. 나이는 비슷한 또래인데 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스무 살은 더 많은 엄마 같았습니다.

제인내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얼마나 생각이 깊냐면 말이죠, 작년 연말에 저랑 제 아내 먹으라고 응언이 라오스식 전통 만두를 사온 거예요. 생각이 너무 예쁘죠? 저 솔직히 남녀노소 막론하고 라오스 사람한테 뭔가 받아본 건 처음이었어요. 비록 소박한 만두였지만 제가 받은 감동은 대박이었죠.”

17세 라오스 소녀 응언

한국으로 돌아온 후 제인내씨와 통화를 했는데, 그가 “응언을 크게 혼냈다”라고 하더군요.

“왜요? 무슨 일이죠?”

“아니 글쎄, 선수들 이발해 주느라고 밤 11시까지 집에도 안 가고 훈련장에 있지 뭡니까. 밤늦게 집에 가면 위험한데 그 시간까지 선수들 머리를 깎아준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응언에게 잔소리를 했어요. 하하"

응언에게는 이발 기술도 있나 봅니다. 응언의 ‘엄마 노릇’이 궁금하다면 직접 라오 브라더스를 방문해보세요. 언제든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라오 브라더스의 문은 항상 열려있습니다. 연락 주세요.

'헐크' 이만수의 꿈 “야구로 받은 사랑, 야구로 갚겠다!” 대한민국 프로야구의 역사와 함께 했던 이만수 前감독(SK 와이번스)이 야구 불모지 라오스에서 펼치는 유소년 육성기. 라오스 판 ‘엘 시스테마’의 기적을 만들어가는 현장을 만나본다.

* 이 콘텐츠는 헐크 파운데이션(Hulk Foundation)의 스토리펀딩 프로젝트 내용을 재가공한 것입니다. 라오 브라더스와 헐크 파운데이션 후원에 관심이 있는 독자분들께서는 재단 페이스북(facebook.com/leemansoo22)으로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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