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얌전히’ 바티칸을 품은 거리, 보르고 피오(Borgo Pio)
‘얌전히’ 바티칸을 품은 거리, 보르고 피오(Borgo Pio)
‘얌전히’ 바티칸을 품은 거리, 보르고 피오(Borgo Pio)
2016.05.23 17:42 by 김보연

로마라는 도시가 그렇다. 그저 지하철을 내려 아무 생각 없이 걷다가 순간 고개를 돌리면, 코 앞에 ‘콜로세움’이, 갑자기 ‘트레비 분수’가 등장한다. 버스를 타려고 무덤덤하게 정류장 앞에 서면 ‘시저의 살해장소’가 버젓이 펼쳐진다. 그런고로 ‘바티칸 근처의’ 혹은 ‘바티칸을 품은’ 같은 수식어가 참 무색하다. 엄밀히 말해 바티칸 근처에는 거리가 한 두 개 있는 것도 아니다. 베드로 광장에서 천사의 성으로 뻗은 대로 ‘화해의 길’(Via della Conciliazione)을 중심으로 수 많은 길이 곁 가지처럼 엉켜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소개할 거리, ‘보르고 피오(Borgo Pio)’를 특별히 찾는 이유는 뭘까? 우연이 들어선 후, 더듬더듬 걸어 한 번을 더 찾고, 이내 또 다시 찾게 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고민 끝에 나름대로 마음에 솟은 단어는 바로 ‘얌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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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광장에 잠깐이라도 서 있어 보자. 생면부지(生面不知)인 우리를 열렬히 환영하는 사람들이 은근히 많다. “셀피스틱(selfie stick·우리 말로 셀카봉)~”, “1유로(Euro)!”를 외치는 상인들이 우선일 것이다. 소매치기들도 우리를 반긴다. 광장은 성당처럼 검색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소매치기들의 집결지라 해도 무방하다.

성 베드로 광장(St Peter's Square) (사진: Sergiu Leustean / Shutterstock.com)

광장에서 나가면? 우릴 붙잡는 이들의 눈빛은 더 강렬해진다. 머리에 한껏 젤을 발라 넘긴 식당 직원들이 메뉴를 코 앞에 내밀며 호객행위에 나선다. ‘성전’이라는 단어의 위용을 생각해본다면 사뭇 이질감이 느껴지는 풍경 아닌가. 오죽하면 “예루살렘 구 시가지의 호객행위가 가장 따봉이다”란 말도 있다.

그 와중에 숨통이 트이는 골목이 바로 보르고 피오다. 그래서 인지 걷다 보면 더 있고 싶어지는 골목이 바로 이곳이다.

Borgo Pio의 전경

보르고(Borgo)란 말은 본래 로마를 구성하는 구역 중, 14번째 구역을 지칭한다. 단어 자체의 뜻은 ‘구시가지 경계 혹은 성벽 밖의 새로운 구역’이다. 로마의 보르고(Borgo)는 바티칸과 테베레 강변 사이에 위치해있다. 로마 시대 때부터 이 지역에 관한 기록이 있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자신의 영묘로 지었고 지금은 야경으로 유명한 천사의 성(Castel Sant’Angelo)이 위치한 공간이기도 하다.

야경으로 유명한 로마 ‘천사의 성’(사진: anshar/ Shutterstock.com)

9세기 레오 4세 교황은 바티칸 새 성벽을 개축하기 시작하며 ‘LEO의 도시’를 만들었다. 바깥의 세계와 ‘레오의 도시’ 경계를 기준으로 당시 보르고(Borgo) 지방은 성벽의 밖이 되었다. 한동안 죽은 사람을 묻는 장소로 사용되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대가 오며 이 길에 건물들이 들어서며 살아나기 시작했다. 1586년 교황 식스투스 5세는 이 구역을 로마의 14번째 구역으로 지정했다. 안타깝게도 1936년, 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스트 정당의 사무실이 들어서며 기존의 르네상스 건물들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여전히 보르고 피오(Borgo Pio) 만의 매력은 살아 숨쉬고 있다.

이 길은 다른 골목보다 조금 넓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군데 군데 벤치가 있다. 벤치와 더불어 골목 내 가게에도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있다. 인심 좋게 마련된 벤치가 사람들의 발길을 조금 더 끄는 것일 수도. 하루의 여행 일정을 마치고 노곤한 몸을 이끌며 이 골목에 들어선 사람들은 반가움이 더 컸을 것이다.

벤치에 앉아 젤라또 하나 먹으려는 찰나에 다가온 그

물론 직원이 나와 호객을 하는 식당이 여전히 있지만 간단히 그들의 목소리를 제치고 가까운 벤치에 앉아서 싸온 샌드위치를 꺼내 먹어보자. 식당의 온기도 가로등의 낭만도 모두 내 것이 된다.

눈 앞에선 깔끔한 복장의 수녀와 사제들이 익숙하게 걸어간다. 골목에는 호텔들도 있는데, 바티칸 방문에 중점을 둔 투숙객들이 위주여서 그런지 몰라도 소란스러운 화려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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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다양한 성물 가게, 기독교 용품 등이 많다.(짐짓 경건함마저 생긴다.) 프란체스코 교황님의 얼굴이 콜로세움처럼 나열 돼 인쇄된 것도 눈에 띈다. 라파엘로의 <성모 마리아의 결혼식>을 본뜬 작은 태피스트리가 20유로대. 엉성하기는 하나 참 로마스럽고 바티칸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나 뻔한가? 뻔함이 귀엽기도 하다. 더 귀여운 것은 그 제품들을 정성스럽게 바라보는 관광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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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매력을 더해주는 것은 식당들이다. 오래된 식당도 많지만, 어째 젊은 감각의 식당이 더 많아 보인다. 샌드위치 위주로 파는 가게, 와인 마시기에 좋은 분위기의 가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젤라테리아까지. 로마시대, 중세, 르네상스, 20세기에 걸친 굴곡 많은 역사처럼 다양한 매력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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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금이 공존하는 현재의 모습을 가능하게 하는 이유는, 길의 양 끝에 있다. 길 한 쪽은 바티칸으로 들어가는 문 ‘Porta Sant’Anna’, 반대 쪽은 대학건물이 있다. 한 쪽 문을 지키는 건 근엄한 근위병, 다른 한 쪽 문에는 자유분방한 대학생들이 있는 것이다. 대학 건물에서 나온 학생들은 2유로 동전을 들고 피자로 간단하게 허기를 때우고, 친구들과 삼삼오오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성지순례 객들은 그들을 비켜가며 기도의 마음으로 바티칸을 향한다.

Porta Sant’Anna를 지키는 스위스 근위병들

널찍한 이 길에 선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할 일을 하고, 다른 쉼을 취한다. 골목의 주인들은 가만히 있는데, 이곳을 찾는 이들은 늘 왔다가 늘 떠난다. 하루에도 수 만 명의 사람이 찾는 교황의 땅.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그 곳 곁에서 묵묵히 사람들을 맞이하고 떠나 보내서, 괜히 마음이 가는 길.

얌전하고, 평온한 보르고 피오(BORGO PIO)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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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보연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하죠'걷고 또 걷는다.' 걸작이라 불리는 도시 ‘로마’를 백 배 만끽하는 비법이다. 한때 전 유럽의 정치‧경제‧사회‧문화가 드나들었던 로마의 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보물. 작은 골목길이든, 큰 광장길이든 흥미로운 이야기와 사연이 즐비하다. 로마살이 1년 차 에디터가 전하는 ‘로마의 길’ 이야기를 통해, 콜로세움과 바티칸 너머의 진짜 로마를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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