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결국, 사람이다
그래도, 결국, 사람이다
2016.03.24 10:19 by 이창희

몹쓸 생업 탓에 그동안 참 많은 사람을 만나며 살아왔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서랍에 켜켜이 쌓인 명함을 일일이 헤아려 보니 1000장이 조금 넘더군요. 괜스레 마음 한 편을 짓누르는 것만 같은 그 무게에 질리기도 하고, 이유 없이 숨이 턱 막히기도 했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이번에는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곳으로 굳이 발길을 내딛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서도 결국은 많은 이들을 마주했습니다. 내심 기대했던 사색의 시간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죠. 사실 애써 가지려 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 미지의 공간에서마저도 사람이, 그리고 인연이 고팠는가 봅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역설적이게도 제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사색 아닌 사색이 되어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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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마웠던, 그리고 그리울 이들과의 마지막 시간

열차에서의 치열하고도 차분했던 3박4일이 거의 지나가고 있었다. 시베리아 한복판에서는 두어 시간에 한 번씩 정차하던 열차는 모스크바에 가까워지고, 수도권의 주요 도시들을 거칠수록 정차가 잦아졌다. 며칠 동안 정들었던 이들이 수십 분 간격으로 계속해서 열차를 떠난다. 이때마다 플랫폼에선 ‘작별의식’이 거행된다. 연락처와 메일주소를 주고받으며 짧은 언어로 서로의 행운을 빌어준다. 사실 재회의 가능성 따위는 제로에 수렴한다. 단지 그런 행동과 말들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은, 그런 시공간이다.

‘굿바이’ 101호의 사람들이여 (사진:agusyonok/shutterstock.com)

갈리치(Га́лич)역에서 내린, 올해 마흔 다섯의 스타스 아저씨는 이번 열차에서의 내 전담 통역사 역할을 수행해준 고마운 분이다. 미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상 좋은 식료품점 주인 같은 캐릭터로, 기본적으로 남들에게 뭔가 얘기를 들려주기 좋아하는 타고난 스토리텔러다. 나와 몇 마디 나누면서 얻은 내 신상정보를 열차 내 사람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홍보(?)해주고 다녔다. 덕분에 처음 보는 승객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계기가 됐다. 다만 수차례 물어봐도 자신에 대한 얘기는 꺼내놓지 않았다. 그저 ‘엄청 어두운 과거가 있는 쓸쓸한 중년 남성인가’라는 추론을 해볼 뿐이었다.

하지만 웬걸, 역에 마중 나온 이들 중 가장 아름다운 미모를 가진 여인과 포옹을 나누곤 자신의 아내라고 소개하는 것이 아닌가. 역시 사람은 쉽게 판단하면 안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으며 그를 배웅했다.

(미모의 아내를 거느린)스타스 아저씨와 (그렇지 못한) 나

열 살의 다니엘도 기억에 남는다. 처음부터 동방에서 온 이방인을 호기심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녀석. 어린이용 외화에서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 나가는 영특한 캐릭터를 연상케 하는 외모로, 분신마냥 끼고 다니는 아이패드가 그의 스마트한 이미지 구축에 큰 도움이 됐다. 전력난에 시달리는 나와 함께 다른 객실을 돌며 전기가 나오는 콘센트를 찾아 헤매는 과정에서 국적과 인종과 세대를 넘어 의기투합했다. 야로슬라블(Яросла́вль)역에서 기다리고 있던 녀석의 어머니가 감사의 인사와 함께 건넨 따뜻한 빵 한 조각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열차에서 많은 아기들을 봤지만 예카테리나는 단연 독보적인 존재였다. 똘망똘망한 눈망울부터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듯 아장아장 걷는 모습으로 모든 승객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종종 찢어지는 듯한 울음으로 밤잠 혹은 낮잠을 설치게끔 만든 원흉(?)이기도 했지만 그 인형과도 같은 귀여운 모습엔 누구라도 녹아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도 쿨한 성격의 엄마가 툭하면 그녀를 방치하고 사라지는 바람에 내가 몇 번을 안아 올려 달랬는지 모르겠다.(나중에 딸을 낳으면 수월하게 다룰 수 있을 것 같다)

시베리아 만년설도 녹이는 귀여움을 보유한 예카테리나

열차에서 내리기 전 그간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했던 이들과 뒤늦게 어울리다 만난 이리나는 모스크바의 한 언론사 기자란다. 더없이 반가운 마음에 한 시간을 눌러앉아 대화를 나눴다. 같은 직업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반가움도 컸지만 서로 공유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움도 적지 않았다. 역시나 어느 나라를 가든 격무와 스트레스는 기자의 트레이드 마크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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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횡단열차의 말․말․말

러시아에서 만난 이들의 촌철살인과 같은 한 마디.

나를 울리고 웃긴, 때로는 어이없게도 만든 횡단열차의 어록

(사진:Rawpixel.com/shutterstock.com)

※ “Are you spy?”
-블라디보스톡 역사 내에서 마주친 경찰 할배. 신기한 마음에 역사 곳곳을 촬영하고 있던 내게 다가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 “물인가?”
-횡단열차 둘째 날 아침 옆자리에 탑승한 바실리 아저씨. 보드카를 들이키던 중 내가 건넨 소주 한 컵을 마신 뒤 내게 어깨를 들어보이며.

※ “이거 발음 못 하면 밥도 못 먹을 줄 알아”
-울란우데에서 탑승해 내게 러시아어 회화 과외를 해 주던 나이 지긋한 러시아 할머니. 회화책을 열심히 읽고 있는 내게 발음이 틀렸다고 지적하며.(실제로 이 할머니는 내 발음이 본인의 맘에 들어야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는 걸 허락했다)

※ “그건 세계 모든 여자가 다 똑같아. 우리 엄마도 그래”
-하바로프스크에서부터 같이 맥주를 마셨던 알렉세이. 한국 여자는 어떤 남자를 좋아하느냐는 말에 장난삼아 ‘돈 많은 남자’라고 대답했더니 어이없다는 듯이.

※ “네가 이틀을 여기에 머무른다면 분명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될 텐데”
-이르쿠츠크 호스텔에서 만난 러시아 여행자 베로니카. 이르쿠츠크에 24시간도 머무르지 않을 것이란 내 계획을 듣고 난 뒤 아쉽다는 표정으로.

※ “아내와 딸을 보러가고 싶지만, 내가 일하지 않으면 우리 가족은 이것만 먹어야해”
-치타로 향하는 열차에서 마주 앉았던 트럭운전사 이고르. 가족사진을 손에 쥐고 레토르트 감자 스프를 떠먹으며.


# 6박7일, 9288km, 그리고 내 인생의 횡단열차

새벽 4시. 불과 30분 후면 러시아의 수도 모스크바에 도착한다. 설레는 마음에 이미 자정부터 잠은 제쳐두고 객실 내 사람들과 못다한 얘기들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어머니를 보러 가는 아들, 동생들을 만날 생각에 들뜬 언니, 둘도 없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청년까지 모두들 흥분에 찬 표정들이다. 사랑하는 이들이 자신을 기다려주고 있다는 생각이 그들을 그렇게나 행복하게 만드는 걸까.

드디어 열차가 멈춰 선다. 9288km, 도무지 엄두도 나지 않던 거리를 마침내 달려왔다. 지나온 6박7일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흥분되고 두려웠던, 철렁하고 아찔했던, 행복하고 뿌듯했던, 아련하고 아쉬웠던 모든 순간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대단한 일을 해 낸 것은 아닐지 모르겠으나 분명 우습게 치부할 일 또한 아닌 것이란 생각에 가슴 한 구석이 벅차오른다.

그동안 고생해준 차장 고모들과 뭉클한 마음으로 포옹을 하며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넨다. 열차에서 함께 내린 이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고 이제는 정말 마지막 작별의 시간을 갖는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찡해지는 동시에, 지금까지 잘 버텨준 내 자신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그렇게 감상에 젖어 한참을 모스크바역 플랫폼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나를 이곳까지 데려다준 열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본다. 누군가는 다시 길을 떠나야 하고 열차는 그들을 싣고 달릴 것이다.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이들과 부대끼며 울고 웃었던, 모든 것을 잊고 마음 편히 행복할 수 있었던 시간들. 내가 몸담았던 그리고 잊지 못할 2016년 2월의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그렇게 내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다.

모스크바역, 떠나는 열차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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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 특집

이번 여행의 목적인 시베리아 횡단을 마치고 난 터라, 2박3일간의 모스크바는 그야말로 내게 ‘덤’이었다. 그리 볼거리가 많진 않았으나 인상은 강렬했던 모스크바의 주요 랜드마크를 소개한다.

※성 바실리 성당(Собор Василия Блаженого)
16세기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성당. 우리에겐 게임 ‘테트리스’로 이미 친숙하다. 멀리에서 보이는 수려한 외관과 달리 코앞까지 가보면 칠이 벗겨지고 벽이 낡아 보존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짝사랑하는 선배는 멀리서 바라봐야 가장 멋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성바실리성당

 

※국립역사박물관(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исторический музей)
모스크바 붉은 광장 입구에 위치한 러시아의 대표적 박물관. 석기시대부터 19세기 말까지 러시아 역사에 관한 전시품을 소장하고 있다. 러시아에서 본 가장 웅장한 건축물이다.

국립역사박물관

 

※레닌 묘(Мавзоле́й Ле́нина)
러시아 혁명의 주인공인 블라디미르 레닌의 시신이 안치돼 있는 영묘. 1930년에 완공됐으며 붉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이 뒤에는 스탈린을 비롯한 역대 소련공산당 서기장들의 시신도 함께 안치돼 있다.

레닌묘

 

※굼 백화점(ГУМ универмаг)
1893년에 만들어진 모스크바의 대표 백화점. 총 3층이지만 가로 면적이 넓어 200개가 넘는 점포가 입점해 있다. 스탈린 시절 국영으로 운영되다 소련 붕괴 후에야 민영화됐다.

굼백화점

# ‘이 겨울,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오르다’ 시리즈를 마치며

러시아를 다녀온 지 한 달 하고도 보름이 지나는 동안, 이상하리만큼 빠르게 일상에 잦아들며 차분하게 나만의 시간과 공간으로 되돌아왔다. 여행을 마친 뒤면 으레 찾아오던 감정과잉증후군(임의적 표현)에 조금도 시달리지 않았다는 것은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었다. 다녀온 곳이나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며 감상에 빠지지도 않았고 서둘러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갖지 못했다.

열이틀 동안의 러시아가 인상 깊지 않은 탓도 아니다. 단일 여행으로는 가장 긴 시간을 해외에서 체류한 경험이었고, (지난 여행기를 보면 알겠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에피소드를 겪으며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만났던 것이 사실이다.

너무도 평온한 일상을 영위하는 내가 이제는 정말 철이 든 걸까 싶은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여행의 기억으로 감정이 요동치는 것은 여행자만의 특권일진대, 철이 든다는 이면에 뜨겁게 끓던 가슴이 굳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 못내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다.

그런데 그 연유를, 총 6편의 여행기 중 5편을 탈고한 후에서야 어렴풋이 깨닫게 된 것 같다. 5주가 넘는 시간 동안 글을 써 오면서 난 여전히 시베리아에, 그리고 횡단열차에 머물고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다양한 에피소드와 사람들, 그리고 그 감상에 대해 기록해나가는 동안 그 공간에서 내가 떠나왔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던 거다. 글이라는, 감정을 장악하는 존재의 무게감을 다시금 절실히 체감하는 순간이다.

이제는 몸도 마음도 모두 열차에서 내릴 시간이다. 그동안 시베리아에서 만났던, ‘serendipity’가 되어 준 소중한 모든 이들에게 다시 한 번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그리고 지난 6주 동안 여행기를 통해 함께 공감해준 독자 여러분들께도 깊은 감사의 뜻을 전한다.

“Спасибо, люблю тебя!”

여러분 안녕! (사진:Helen's Photos/shutterstock.com)


※Special Thanks To: 송지은, 박성우, 조다희, 지소희, 아나스타샤, 리마, 바실리, 칸타실라, 에스테로, 세르게이, 소르비나, 알렉세이, 카닌, 이반, 다이미르, 예스퍼, 길리우, 콜리아, 이고르, 나타샤, 마리나, 로이, 스타스, 다니엘, 예카테리나, 이리나, 알마스, 그리고 김진욱.

필자소개
이창희

부(不)편집장입니다. 편집을 맡지 않았으며 편집증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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