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을 인정하는데 필요한 시간들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데 필요한 시간들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데 필요한 시간들
2016.03.15 15:56 by 이양구

'살아있는' 공연, 공연예술인,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드는 극장과 관객… 지금 '살아있는' 예술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본다.

까르르 웃고 싶으면서도, 모든 것에 화가 치미는 것. 일본군 위안부를 연기한다는 것.

2007년, 장애인 5명으로 창단한 극단이 있다. 장애와 비장애를 떠나 연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뜻을 모은 것. 그래서인지 작품활동도 독특하다. 단편적인 공연보다는 단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을 도모하는 자신들만의 레퍼토리를 구축하고 있다.

왼쪽부터 극단 애인 김지수 대표, 백우람 연출, 강예슬 연출

극단 애인을 이끌고 있는 세 명의 연출가를 만났다. 2016년의 첫 공연인 <3인 3색 이야기>가 끝난 직후다.  <3인3색 이야기>(2016. 2. 19. ~ 2. 22. 성북마을극장)는 세 편의 단막극으로 구성. 장애인 단원들이 직접 쓰고, 연출하고, 연기까지 선보인 작품이다. 극단 측 관계자는 "내년 10년차를 맞은 극단 애인의 모든 단원이 초심으로 돌아가 극작, 연기와 조명, 무대 디자인 등을 기초부터 공부하며 제작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귀띔했다. 필자가 총연출로 참여하긴 했지만 실제론 공연이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도의 역할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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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수(이하 김) = 배우들과 합평회를 했는데 연습 기간이 짧았다는 얘기가 나왔어요. 하지만 실제 시간이 짧았다기보다는 연출들이 초보라서 그런 것 같아요. 연출가들이 주는 디렉션(direction)을 배우들이 습득하고 이해하는 시간이 부족했다고 봐야죠. 처음이다 보니 요구하는 감정도 너무 어려웠다고 하고. (미안한 듯 웃었다). 총연출님이나 총조연출님이 계셔서 안심하고 갔어요. 보신 분들은 조화가 잘 맞았다고 하더라고요.

백우람 (이하 백) = 네 맞아요. 단막극 세 편에 참여했던 배우들이 이 팀 그대로 다시 공연을 하고 싶다는 얘기도 나왔어요.

장애인 엄마와 성소수자 딸의 재회와 상호 인정을 보여주는 <기억이란 사랑보다>(김지수 작/연출)(사진 : 극단 애인 제공)

희곡에서는 극중 인물이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막상 공연에서는 배우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극중 인물도 자연스럽게 장애인으로 보였다. 무슨 이유에서일까.

김 =  모 신문사 기자가 <건드리지 마세요>를 보고 쓴 기사를 보니, 인물들을 자연스레 장애인으로 봤더라고요.  사실 우리 극단의 연극을 본 많은 사람들은 주인공의 성격보다는 그가 장애인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는 경향이 조금 있는 것 같아요.

특별히 ‘장애’에 대해 얘기하지 않아도 극단 ‘애인’의 연극을 장애 혹은 사회문제를 다룬 연극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기억이란 사랑보다>의 ‘차수영’역 역시 대본상에서는 장애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애인 배우가 막상 무대 위에 오르자, 장면은 훨씬 강렬해졌다. 장애인 엄마와 성소수자 딸 사이에 장애인이면서 성소수자(동성애자)인 ‘차수영’이 배치되자 정말 절묘했던 것이다.

김 = 예전에 인권 강의를 들을 때 어떤 동성애자가 나와서 말씀하시는 걸 들은 적이 있어요. 사람들은 쉽게 '동성애자'라는 말로 그를 판단하지만, 자기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받아들이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했는지 아느냐고 물으셨어요. 그걸 인정하면서 느껴지는 당혹감 때문에 석 달 이상을 잠을 못자고, 그 사실을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10년간 숨겨왔다고 말씀하셨죠. 저도 장애가 있잖아요(김지수 대표는 척추장애를 갖고 있다). 제가 장애인이라는 걸, 내 스스로 받아들이는 건 정말 많은 시간이 필요해요. 많은 장애인들이 장애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수용하지 못한 채 살고 있어요. 그게 소수자들의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같이 엮어서 말하고 싶었어요.

<기억이란 사랑보다>(사진 : 극단 애인)

김지수 대표는 연습 도중에 성소수자라는 설정을 빼고 싶어 했다. 하지만 필자는 그대로 진행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왜 성소수자란 설정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을까.

김 = 성소수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말한다는 것과 내가 장애인이니까 성소수자 얘기를 너무 쉽게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같이 들었어요. 제가 서울시청 앞 도서관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는데 성소수자 반대 집회가 시끄럽거든요. 책을 보기가 어려울 정도로요. 이런 사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게 조심스러웠고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장애인과 성소수자. 둘 다 소수자라고 해도 그 이유만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소수자끼리는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것일까.

김 =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나의 삶과 다른 소수자의 삶이 어떤지. 우리 사회에서 서로가 겪고 있는 차별이나 배제,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것들이 있거든요. 그런데서 공통 지점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소수자로서의 삶을 서로 이해하게 되는데요. 그렇다고 소수자들이 무조건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세상과 사람을 보는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집세를 받으러 와서 입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무뢰한들을 피해 4층 옥상에 피신해 있는 남매를 보여주는 <건드리지 마세요>(강예슬 작/연출)(사진 : 극단 애인 제공)

<건드리지 마세요>를 쓰고 연출한 강예슬은 비장애인이다.

강예슬(이하 강) = 대본을 썼을 때 말하고 싶었던 건 많았어요. 돈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어요. 인간의 노력으로도 해결되지 못하는 구조,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고통 받은 청소년, 이 고통을 청소년들이 받아들이는 과정, 또 그에 반응하는 청소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는 사람과 부딪히고 싶어하는 사람의 이야기를요.

<건드리지 마세요>에는 폭력이 가해지는 현실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서은(여동생)과 각자 자기 할 일을 하는 것일 뿐이라며 책만 읽는 은수(오빠)의 입장 차이가 팽팽한 긴장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분노는 넘치는 반면 원인에 대한 정밀한 탐색은 부족했다는 아쉬움도 있다. 

강 = 사실 대본을 쓰면서 사회구조적인 부분에 대해선 정확하게는 몰랐어요. 자본 때문에 받은 고통만 있는 상태에서 접근하다보니 원인, 핵심을 잘 말하지 못한 것 같아요. 연습을 하면서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했는지를 잊고 연습을 하기도 했고요. 오히려 공연을 올리고 나니 정리가 됐어요. 두 인물이 서로가 얼마나 힘든가에 대해서는 대화가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견딘다'는 표현 보다는 소통을 해도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나오는 극단적인 결과물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어요. 마지막에 화분을 던지는 장면도 그래서 나왔고요.

<건드리지 마세요>(사진 : 극단 애인 제공)

<건드리지 마세요>의 마지막 장면에서 서은은 4층 아래로 화분을 던진다. 화분에 엄마가 맞을지 엄마를 때리고 있는 ‘양복’이 맞을지 관객은 알 수 없다. 서은은 오빠의 말처럼 사람들이 ‘각자 자기 할 일을 할 뿐’이라면 화분을 던지는 것도 ‘자기가 할 일을 할 뿐’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배우로만 활동하다가 처음 대본도 쓰고 연출까지 한 백우람은 어땠을까.

백 = 작가로서 얘기하는 것과 연출로서 얘기하는 게 다른 것 같아요. 작가로서는 반전을 말하고 싶었고, 연출로서는 소통을 말하고 싶었어요. 미현을 청각장애인으로 설정한 건 뇌성마비인 저의 불편함을 관객들도 알았으면 좋겠다는 뜻이었어요. 초고에서는 비장애인이 장애인인 척 하는 인물이었는데 공연에서는 진짜 장애인으로 바꿨어요.

이웃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참지 못해서 맞불로 소리를 내다가 상대가 청각장애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당황하는 남자를 보여주는 <소리전쟁>(백우람 작/연출)은 단편 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다.(사진 : 극단 애인 제공)

<소리전쟁> 초고에서 하남은 자신과 소리 전쟁을 벌였던 미현이 알고 보니 청각장애인이었다는 것을 알고 망연자실한다. 그런데 공연이 끝날 무렵 미현이 사실은 청각장애인이 아니었다는 ‘반전’이 나온다. 청각장애인에 대한 편견과 이해에 대한 관객의 ‘착각’을 송곳처럼 찌르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연출을 하면서는 ‘송곳’ 같은 공격보다는 청각장애에 대한 이해와 소통을 위해서 진짜 장애인으로 설정을 바꾸었다는 말이다.

<소리전쟁>(사진 : 극단 애인 제공)

장애인 배우가 연기를 할 때 생기는 갈등은 소통의 어려움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김=장애인끼리도 서로 다른 장애들로 갈등을 겪어요. 각자의 신체적인 장애 때문에 발생하는 다른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하고요.

연출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장애를 기준으로 다른 장애를 가진 배우에게 자신에게 익숙한 움직임을 요구하고 있더라는 말이다. 각자 가진 신체장애가 다른 만큼 타인이 가진 장애 때문에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움직임에 대해서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야한다.

김= 이전 작품(<무무>)를 할 때도 많이 느꼈어요. 다양한 장애가 있는데 장애인끼리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노력도 잘 하지 않았고요. 저희가 이 문제로 밤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각자 장애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뭘 잘 하는지를요.

강=<무무>때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이 전부 배우였기 때문에 서로 배우로서 이해하는 게 필요했다면, 이번에는 장애를 가진 연출가가 장애를 가진 배우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고 그걸 표현하는 데서 오는 어려움이 있었어요. 신발 하나 벗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대단히 불편한 요구일 수 있었어요. 중요한 건 그 배우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게 아닐까요.

이번 공연에 관객이 몇 명이나 왔을까.

김= 200명. 5회 공연이니까 회당 30명 좀 넘게 온 편입니다. 많이 오신 편이죠.(웃음)

극단 <애인>은 2007년 9월 30일에 첫모임을 시작했다. 그 자리에는 백우람과 김지수도 있었다. 김지수는 처음에는 서울에서 최초의 장애인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휠’에서 활동을 하다가 윤정환 연출의 조언으로 극단을 만들게 되었다.

김=저는 지금까지 어떤 장(長)이나 대표를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직장 다닐 때도 조용히 있는 사람인데 고민을 많이 했어요. 제가 ‘휠’에 있을 때 연극무대에 선 적이 있었어요. 연기를 너무 못했는데도 커튼콜할 때 많은 분들이 박수를 쳐주셨어요. 부끄럽고 창피했죠. 정말 최선을 다하고 연기를 잘하는 장애인이 박수를 받으면 정말 행복하겠다, 행복한 배우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 사람 혼자 잘 되는 게 아니라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 그런 배우가 있는 극단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연기 잘하는 배우들, 그래서 행복한 배우들이 있는 극단을 만들고 싶다. 2007년도에 국토종단을 갔는데 여주, 수원 등 각지에서 온 장애인들을 많이 만났어요. 그때 사진 찍으러 온 우람이를 만났어요.

백=김지수 대표님이 “네가 여기서 사진 찍어도 되고 다른 거 해봐라”라고 해서 왔죠.

극단 애인의 <고도를 기다리며>(사진 : http://www.dodls.kr)

‘애인’이란 이름은 장애인의 ‘애인’(碍人)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뜻하는 ‘애인’(愛人)이기도 하다. 내년이면 10주년을 맞는 극단 애인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김=극단 ‘애인’이 정말 연극을 하는 사람들이 됐으면 좋겠어요. 예슬이는 좋은 연출가가 됐으면 좋겠고, 우람이와 다른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행복하고... 단원들이 대부분 장애인이라 돈을 많이 버는 것도 한계가 있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가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요. 하지만 돈이 없어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으면 하는데, 연극을 하면서 그랬으면 좋겠어요. 연극은 혼자 하는 게 아니라 같이 하는 거잖아요. 행복한 사람이 있는 극단이 됐으면 좋겠어요.

백=음... 극단 이름이 ‘애인’이잖아요. 우리는 연극을 사랑하고 같이 사랑했으면 좋겠습니다.

강=제가 지수언니한테 포기하지 말라고 많이 얘기 하는 게 몇 개있어요. 그게 다 ‘장애 정체성’인 것 같아요. 그게 저희들만이 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하고 극단 애인에서 가장 좋아하는, 여기에 있는 이유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요. 그걸 계속 가져가는 것. 장애 예술에 대한 계속되는 탐구를 하는 극단이 됐으면 좋겠어요.

김=장애인 예술가라는 말에 묶여 있는 걸 싫어하는 분들도 있대요. 그럴 수 있지만 저는 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애 예술, 장애인 예술가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중증 장애인이 무대에서 주인공을 할 수 있는 연극, 그러면서도 손색이 없는 연극. 저희들이 앞으로 해야 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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