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에서 영감을 얻는다, 디자이너 정광열
수다에서 영감을 얻는다, 디자이너 정광열
2015.12.24 07:35 by 구승준

크리에이티브는 어디에서 폭발하고, 어떻게 숙성 또는 변형되며, 어떻게 완성되는가? ‘크리에이티브’라는 단어에서 연상되는 가장 빤한 이미지는 대뇌 ‘생각의 전구’에 불이 번쩍 하고 들어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크리에이티브를 이루는 일련의 과정 가운데 아주 작은 요소다. 크리에이티브를 현실화하는 데는, 상대성원리를 발견하기까지의 기간보다 그것을 대중에게 설명할 방법을 고민한 기간이 더 길었다는 아인슈타인의 고백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여기서는 그 얘기를 듣는다. 그들의 공상가적인 열정과 만년대리 같은 성실성, 아이디어를 세일즈 하는 마케터 같은 수완까지 크리에이티브의 모든 것.

 

“음악광에게 음악을 못 듣게 한다거나, 아침잠 많은 사람을 매일 새벽에 깨우면 어떻겠나. 습관을 억제하면 괴롭다. 내게 창작은 습관이다. 못하면 고통스러운.”  

공업 디자인으로 출발해 편집 디자인, 드로잉 작업, 애니메이션, 제품 디자인, 인테리어 디자인, 설치 미술 등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전방위 디자이너 박원철 크리에이터 편.

디자이너 정광열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정광열 디자이너는 서점에 걸린 현수막의 글귀를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사람과 나누는 대화에서 가장 많은 영감을 얻는다고 말하는 아티스트답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대화가 아니라 수다”다. 그는 시종일관 유쾌하다. 자신을 고릴라처럼 생겼다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초면의 사람조차 단숨에 무장해제 시킨다.

그는 “책에 있는 말은 정제된 조제약이지만, 사람이 마음 놓고 말하는 ‘수다’는 생약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정제된 약은 원하는 성분만 인위적으로 모은 것이지만, 생약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성분까지 통째로 함유된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른다. 같은 맥락에서, 책은 이상의 구조물이지만, 수다는 현실의 유통방식이다.

정광열 디자이너는 자신에게 영감을 주는 수다를 좇아 작업을 해왔다. 지하철 역사에서 쭈그리고 자는 노인을 카메라에 담기도 하고, 퇴근길 버스 정류장에서 나누는 직장인들의 대화를 카툰으로 구성해보기도 한다. 술자리에서 친구가 토로한 고민이 그대로 일러스트레이션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수다가 주는 영감을 따라, 그의 창작 영역은 제품디자이너에서 사진가로, 일러스트레이터로 확장일로에 있다.

'피로'_디자이너 정광열에게는 지하철이 훌륭한 작업장이다.

돈도 없고 빽도 없어서 디자인공부에 매달렸다

돈이 나를 막는다

 

학창시절은 어땠나?

정광열(이하 정) : 눈에 잘 띄지 않는 통통하고 착한 남학생이었다. 조용하게 지냈지만 교회에서 내 열정을 이끌어낸 선생님을 만나 성격이 변했다. 이후로는 그룹사운드의 리드보컬, 연극주연도 했다. 자신감이 생기다보니 유머도 배였고,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게 됐다.

 

대학 때 목표는?

정: 입학 초기에는 사람 사귀는 걸 좋아하고,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해 공부도 안 하고 놀기만 했다. 그러다가 군대를 다녀온 후 ‘돈도 없고 빽도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돈이 있는 ‘금수저’들은 나와 함께 놀아도 갈 길이 달랐기 때문이다. 돈 때문에 모멸감을 느낀 적이 여러 번 있었고, 그때부터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원래는 미래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는 놀러 다니던 아이였지만, 그 결심을 한 후부터는 열심히 디자인 공부에 전념했다.

 

 

뭐좀안떨어지나

 

 

대학 졸업 후에는?

정: 졸업하기 전에 대기업 제품디자인실에 입사했다. 집에 들어간 날보다 안 들어간 날이 더 많을 정도로 정말 바쁘게 일했다. 하지만 내가 그때 배운 건 디자인보다 사회생활이었다. 그러나 그 ‘잘 나가던’ 대기업이 하루아침에 흔들리게 됐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보았다. 정의감을 참지 못 하고 회사에 대들다가 그게 자진퇴사로 이어졌다. 퇴사 후 IT기업에 재입사했다.

 

나무 살 돈이 없는 피노키오

  

 

대단한 작품이 아니다, 그냥 ‘일상의 끼적임’이다

 

IMG_2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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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벌고 싶은 돈은 충분히 벌었나?

정: 돈을 좇는다고 돈을 버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내실을 다져야만 했다. 그래서 프리랜서로 여러 분야에 대해 공부하고 도전했다. 사진작가도 했고, 디자인컨설팅도 했다. 결국 타인을 이롭게 하다 보면 돈이 따라온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꿈꾸는 자가 성공할 수 있다는 것도. 나는 일상의 작업에 더욱 충실해졌다. 틈나는 대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었다.

 

그 작업들은 어떤 것인가?

정: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지인의 카페에 자주 갔는데, 거기서 무심코 일회용 커피 잔에 그림을 그렸다. 그걸 본 갤러리 관장님이 내 그림에 관심을 보여 전시도 했다. 지하철에서 벌어지는 소소한 일들을 유머러스하게 그렸는데, 20개 중 8개가 판매됐다. 나머지 작품은 팔리지 않았다. 내가 의기소침할 때 그린 그림이라 그런지, 보는 사람들마다 너무 우울하다고 했다고.

 

작품의 소재는 무엇인가?

정: 모두 일상적인 것들이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거리를 걷다가 보는 사람들, 사무실에서 만나는 동료들 같은. 요즘처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루돌프 사슴도 택배 배달 때문에 힘들겠다.’는 장난스러운 생각에서 출발해보기도 하고, 달동네와 부자동네의 격차가 너무 심해 보여 그걸 소재로 삼기도 한다. 대단한 작품이라기보다는 그냥 ‘일상의 끼적임’이다.

 

 

가난한마을사파리_copy_gorira1

 

 

 

스티브 잡스는 정보와 마케팅, 디자인을 하나로 통합한 아티스트

요즘은 뭘 하는가?

정: 경기가 어려우니 디자이너도 먹고 살기 힘들다. 한국의 제조업체는 점점 줄어들고, 살아남은 제조업체들도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기보다는 중국에서 수입하는 곳이 많아졌다. 그나마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는 디자인 단가를 턱없이 낮추었는데, 문제는 디자이너가 점점 늘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새로운 활로를 찾아서 올해부터는 프로그램 제작과 홍보마케팅을 시작했다.

 

사진_패션쇼 촬영작업

고고하게 디자인만 하지 않고 여러 가지를 한다.

정: 디자이너가 틀에 갇혀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해외 유명 편집장도 디자이너 출신이 많고, 내가 존경하는 스티브 잡스도 디자이너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그림을 잘 그리는 게 어떤 디자이너의 특성일 수는 있지만, 좋은 디자이너가 반드시 그림을 그릴 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스티브 잡스는 정보와 마케팅, 디자인을 하나로 통합해 예술로 만든 아티스트다.

 

종이로 만든 스마트폰거치대_지갑에 넣어 두었다가 스마트폰을 거치할 수 있는 제품으로 특허를 받았다.

 

종이로만든스마트폰거치대2

 

 

지금의 꿈은 뭔가?

정: 예전에는 돈을 많이 벌어 여행을 한다든지 빌딩을 산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부와 명예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많다는 것을 실감한다. 내가 하는 소소한 디자인이나 프로그램, 홍보에서 누군가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 그건 정말 힘든 일이다.

 

영감의 원천은 무엇인가, 어디에서 영감을 얻는가?

정: ‘수다’에서 영감을 얻는다. 새로운 정보를 알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감정의 소통을 통해 깨닫는 게 많다는 뜻이다. 책으로 읽거나 대면해서 얻는 경험은 내 몸을 그냥 스쳐 지나가는 ‘기체’ 와도 같다. 반면에, 사람들과 교감하며 나누는 ‘수다’라는 경험은 액체처럼 푹 절여져 내 몸에 오래 남는 듯하다.

 

버스정류장에서_ 자유, 탈출 아니면 도피

 

 

정광열

정광열 | 경기대학교 산업디자인과 졸업. 대우전자 디자인실. 대진대학교, 오산대학교 강사 등 역임. 당산 주노헤어샵 재능나눔 강사 / 부산 맥화랑 주최 100인 신인작가 전시, 계원예술대학교 정기그룹 전시회 등 다수 전시, 멀티카페 삼삼오오에서 전시 중  / 조선일보 광고대상 가작, 대웅제약 캐릭터 공모전 입선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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